음악의 힘으로 악령 퇴치? 칼군무 vs. 즉흥연주

케이팝데몬헌터스와 씨너스에 담긴 음악과 그 이상

by Souve

0. 음악의 힘!

대학원에서 음악과 철학에 대해 가르쳐주시던 Martin Scherzinger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종종 음악과 철학의 유사성에 대해 말하곤 했다. 음악은 언어와 달리 직접적 지시성이 약하다. 언어가 '사과'라는 기표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로 사유를 제한한다면, 음악은 철학처럼 본질에 대한 다층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Martin 교수님은 아프리카 전통음악의 파괴를 예로 들었다. 제국주의가 도입한 '시계'와 '악보'라는 서구적 시간관념이 아프리카 고유의 리듬과 돌림노래를 표준화할 수 없는 '비음악'으로 만들어버렸고 이로 인해 아프리카 전통 음악이 유실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음악은 단순한 예술 장르를 넘어선다. 사회·정치·경제적 구조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 구조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갖는다. 따라서 음악의 힘은 단순한 메시지 전달이나 감정 표현을 넘어선다. 사회 구조와 집단 무의식에 파동처럼 공명하는 근본적 영향력이다.

물론 이런 물리적인 힘도 있다


2025년, 음악으로 초자연적 존재와 맞서는 두 작품이 등장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헌터스'와 라이언 쿠글러의 '씨너스'. 둘 다 음악을 주요하게 다루지만, 그 접근 방식은 정반대다. 하나는 완벽한 칼군무를 추다 악령을 썰어버리고 (케데헌), 다른 하나는 찐득한 블루스를 부르다 말고 뱀파이어와 싸운다. 두 영화 모두 음악영화이면서 오컬트 영화로서, 음악과 초자연적 존재를 다루지만 음악적 장르도, 미학도, 그 안에 담긴 사회, 정치, 경제적 함의도 다르다. 어쩌면 이 두 영화가 불러올 변화까지도.

이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두 영화 속의 음악,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뇌내망상에 가까운) 함의를 살펴보자


1. 케이팝 데몬헌터스과 씨너스

먼저 두 작품의 설정과 줄거리를 살펴보자.


'케이팝 데몬헌터스'는 한국의 무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춤과 노래로 악령을 물리치고 혼문(귀신이 넘나드는 문)을 지키던 무당들이 이제는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가 되었다. 이들의 적은 악령을 세계로 퍼뜨리려는 '사자보이즈' - 저승사자를 모티브로 한 라이벌 아이돌 그룹이다.

'씨너스'는 1932년 미시시피 소도시의 하루를 배경으로 한다. 스모크/스택 쌍둥이가 꿈꾸던 블루스 클럽이 드디어 문을 연 밤, 아일랜드 포크송을 부르는 뱀파이어들이 나타난다. 목사 아들 새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형들과 함께 블루스를 부르다 뱀파이어들과 맞선다.


음악과 오컬트의 만남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로버트 존슨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기타 실력을 얻고 27세에 요절했다는 전설이나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타난다는 얘기 등, 소리와 음악에는 늘 초자연적 힘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음악 자체가 오컬트 영화의 주제가 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몰입감과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로만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케이팝 데몬헌터스와 씨너스는 특별하다. 음악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며, 때로는 초자연적 존재를 물리치거나 초자연적 존재와 경쟁하는 주된 수단으로써 다뤄진다. 다시 말해 두 작품 모두 음악적 완성도와 영화적 재미를 모두 갖췄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같은 '음악으로 악령 퇴치 (또는 유혹)'라는 설정에서 출발해 정반대의 미학과 가치관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2. 장르 간 미학: 통제 vs 자유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 두 그룹은 모두 완벽한 아이돌이다. 길거리에서든 무대에서든 칼군무와 완벽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케이팝의 미학이 바로 이 '완벽한 통제의 쾌감'에 있기 때문이다. 케이팝은 철저히 계산된 미학이다. 뚜렷한 콘셉트에 맞춰 오디션으로 선발된 멤버들이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 무대 위에서 '정답'을 구현한다. 개별 멤버의 움직임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경쟁은 누구의 정답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에 대한 경쟁이고 이는 누구의 팬덤이 더 크고 많은지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씨너스의 새미 또는 블루스 연주자들은 다르다. 새미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말하는 'I lied to you' 노래로 거짓을 고백한다. 서로 적당히 약속한 코드와 구성 안에서 즉흥 연주를 한다. 블루스의 음악 속에서 비보이와 디제이가 오버랩되는 등 그들에게 있어 다름과 자유가 각기 다른 그들을 하나로 만든다. 씨너스에서는 모두가 죄인이지만 자유롭고, 그렇기에 자기 흥에 맞춰 발을 구르고 춤추고 노래한다. 흥미롭게도 블루스 클럽을 찾아온 뱀파이어들은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한다. 아일랜드 민속음악을 부르며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집단의식을 공유한다. 개인의 자유가 아닌 집단의 통일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미학적 차이는 영상 매체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케이팝 데몬헌터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완전히 통제 가능한 매체를 선택했다. 모든 픽셀이 계산되고, 모든 프레임이 의도대로 완성된다. 한 장, 한 장의 프레임이 완벽하다. 뚜렷한 의도를 훌륭한 디테일로 완벽히 만들었다. 반면 씨너스는 다르다. 마이클 B. 조던이 1인 2역을 하고, 블루스 음악의 즉흥 연주 부분에서 DJ와 비보이가 뛰쳐나와 현대와 과거의 시간, 공간이 섞인다.


3. 블루스와 케이팝, 뿌리와 열매

씨너스가 보여주는 블루스의 힘은 블루스가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흑인들의 실존적 증명임을 말한다. 그들에게 블루스는 노예로 고통받아온 오랜 역사이며 해방의 부르짖음이고, 그렇기에 재즈, 소울, 나아가 지금의 힙합으로까지 연결되는 뿌리이다. 해방의 부르짖음과 뿌리이기에 블루스에 있어 진실해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B.B.King "Playing the guitar is like telling the truth - you never have to worry about repeating the same [lie] if you told the truth. You don't have to pretend, or cover up. If someone asks you again, you don't have to think about it or worry about it because there it is. It's you."

B.B. King의 말처럼 "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과 같다. 진실을 말했다면 같은 거짓말을 반복할 걱정이 없다. 가식도, 위장도 필요 없다." 블루스의 즉흥성은 바로 이 진실성에서 나온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오히려 더 진실할 수 있다.


케이팝도 블루스만큼 한국 내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케이팝은 한국의 문화 산업을 대변한다. 따라서 블루스가 흑인들의 뿌리를 상징한다면 케이팝은 한국의 열매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본 아이돌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미국의 음악적 장르들(알엔비, 힙합, 전자음악 등)을 흡수하였고, 한국만의 팬덤 문화를 섞었다. 또, 방송 프로그램 말미에 뮤비를 붙일 수 있는 한국의 미디어 구조에 맞춰 뮤비를 적극 활용하고, 디지털 마케팅 기술을 결합한 결과물이다.

이는 서울의 도시 풍경과 닮아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한글 간판과 네온사인, 전통 건축이 뒤섞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가 된 것처럼, 케이팝 역시 모든 것의 장점을 가져와 섞어낸 문화이며 산업의 산물이다. 블루스가 깊은 뿌리에서 나온 진실성을 추구한다면, 케이팝은 여러 넓은 뿌리에서 나온 완성도를 추구한다. 전통성은 약할지 몰라도 국제적 어필은 강할 수밖에 없는 '달달한 열매'인 셈이다.


4. 음악 안의 작은 사회

케이팝은 우리의 현대사와 산업, 문화의 과실이지만 또한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음악적 차이는 두 사회가 추구하는 성공관과 가치체계의 차이를 보여준다.


케이팝이 추구하는 성공은 명확하다. 음원 차트 순위, 시상식 트로피, 글로벌 투어 규모. 이를 위해 아이돌은 완벽한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춤, 노래, 작곡, 외국어, 심지어 개인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탁월해야 한다. 일종의 완벽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케이팝 아이돌은 대중에게 하나의 정답이자 완벽한 상징이다. 1세대의 신비주의에서 시작해 지금의 (엄격한 트레이닝을 거친) 투명한 완벽주의까지, 아이돌은 항상 일반인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을 제시해 왔다. 칼군무와 완벽한 화음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한국인 없는 케이팝 아티스트를 거듭 만들려고 시도하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단순히 한국인이 없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의하는 성공, 절대선, 완벽함, 가치에 대한 공감대 없이 성장하고 트레이닝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케이팝 그룹에 일본, 태국 등의 외국인 멤버가 있더라도 이들은 한국인스럽게 말하고 사고한다.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그런 춤과 노래 훈련을 받으며 이들은 자연스레 우리의 가치에 물들었기 때문에 국적만 조금 다를 뿐, 어색하지 않다.


씨너스가 보여주는 블루스의 성공관은 다르다. 블루스는 단순한 음악을 넘어 '인간 선언'이다. 새미가 "I lied to you"라고 고백하는 순간, 그는 목사 아들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낸다. 스모크/스택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돈이 어디서 왔든, 과거에 무엇을 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진실된 음악을 듣고 즐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노예처럼 일하고, 노예처럼 농장화폐를 쓰더라도 블루스 클럽 안에서 자기만의 춤을 추고 발을 구르고 사랑을 나누며, 해방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노예제 시대부터 이어진 블루스의 본질이기도 하다. 법적으로는 재산에 불과했던 흑인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을 증명하고 주장했던 것처럼, 씨너스의 인물들도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음악 안에서만큼은 온전한 개인이 된다.


5. 악령의 정체: 우리는 무엇을 무서워하는가?

두 영화가 오컬트 영화로서도 그런 맥락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오컬트 영화는 사회의 무의식적 공포를 가시화하는 장르다. 영화라는 안전한 거리를 통해 우리가 진짜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따라서 악령의 정체를 보면 그 사회가 품고 있는 근본적 두려움을 알 수 있다.


광대공포증이 없으니 우리에겐 그저 '저 안에서 가면 쓰면 덥겠다' 하며 짠하고 웃길 뿐..


특히 자크 아탈리의 '소음: 음악의 정치경제학'에서 소음과 음악에 대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이 두 작품에서 무엇이 악령이고 소음인지 볼 수 있다. 아탈리에게 음악은 기존의 권력관계를 반영하여 사회 질서를 강화한다. 반면 소음은 통제될 수 없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통한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관점에서 두 작품의 악령들을 다시 보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케이팝 데몬헌터스에서 진짜 무서운 소음은 귀마가 아니라 '침묵'이다. 대중의 외면으로 인한 조용함, 팬덤의 이탈로 인한 적막함.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귀마보다도 사인회장이 텅 비고, 음원차트에서 밀려나며, 관객석이 조용해지는 순간이다. 이들에게 팬들의 환호는 존재의 증명이고, 침묵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케데헌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배제'다. 루미와 진우의 정체성 혼란,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팬사인회 경쟁에서 드러나듯, 가장 큰 공포는 집단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목욕탕 신에서 멤버들이 함께 목욕하며 동료애를 확인하는 것도 이런 불안의 반영이다.

반면 씨너스에서 소음은 완전히 다르다. 새미의 기타 소리와 노래는 조용한 평야를 멀리 가로질러, 시간을 넘어 닿는다. 새미의 노래에 끌려 온 뱀파이어들은 본인들도 노래를 하겠다며 아일랜드 민속 음악을 다 함께 질서 정연하게 부른다. 즉, 뱀파이어들에게의 소음은 새미의 기타 소리와 노래다. 블루스의 즉흥성은 견딜 수 없는 혼란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새미를 끝까지 유혹하고 끌어들이려 한다. 이 소음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 - 개인의 목소리, 자유로운 선택, 예측 불가능한 감정 - 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더 이상 두려움도 슬픔도 없는 '완벽한 소속감'을 약속하며 새미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뱀파이어의 설정이었다. 왜 하필 아일랜드 늑대인간 (웨어울프)이나 좀비도 아니고 뱀파이어였을까? 어쩌면 뱀파이어가 '초대받아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감독은 새미네를 습격하는 무리로 뱀파이어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뱀파이어를 집으로 초대하는 블루스 클럽과, 뱀파이어의 집단 안으로 독창적인 개인(새미)을 불러들이려는 뱀파이어. 이 아이러니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두 작품이 보여주는 대조적 공포는 이렇다. 케이팝 세계는 '혼자 남겨지는 것' 즉, 소음의 부재를 두려워하고, 블루스 세계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개인의 독창성, 즉 '나를 잃어버리는 것 (소음의 제거)'을 두려워한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사회의 근본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6. 음악, 국가에서 허락한 합법적 마약

아탈리가 제시한 소음과 음악, 음악과 정치적 관계를 통해 우리는 케데헌과 씨너스에서의 음악이 단순히 하나의 장르, 음악적 쾌감에 그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 음악은 본질이다. 하나는 단일화된 의지를, 다른 하나는 개인의 해방을.

흥미로운 것은 글로벌 시대에 어떤 가치가 더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는가이다. IMDB 스코어나 흥행 성적이 보편적 공감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다.

IMDB rating과 간략한 숫자 비교. 케데헌 사운드트랙이 스포티파이 US chart, 빌보드 차트 상위에 있기도 하다


케이팝 데몬헌터스의 전 세계적 화제성과 사운드트랙의 차트 성과를 보면, 적어도 현재로서는 '완벽한 통제의 미학'이 큰 어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완벽한 정리를 갈망한다. 개인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시대에 역설적으로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이다. 케데헌의 글로벌 성공은 단순히 음악이 좋아서, 캐릭터가 귀여워서라기보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정확히 읽어낸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케이팝의 승리 또는 케데헌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케이팝 역시 블루스에서 나온 흑인 음악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두 장르는 대립보다는 상호보완의 관계에 가깝다. 자유로운 개인이 있어야 소속감도 생길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음악이 주는 경험이다. 완벽한 칼군무로 악령을 처단하든, 즉흥 블루스로 뱀파이어와 랩배틀을 하든, 우리는 음악을 통해 공감하고 위로받으며 소속감도 느끼고, 또 스스로에 대해 돌아볼 수 있다. 통제와 자유, 집단과 개인 -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음악은 음악이다.


p.s.

(참고로 이 글에는 많은 뇌내망상과 주관적인 의견이 섞여 있습니다. 저는 전문 문화비평가가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생각하니, 내가 힙합, 재즈, 블루스를 좋아하고 소속감과 단체 행동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어쩌면 어릴 때 괜히 힙합과 알엔비를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의 힘이 이렇게 무섭다.)

나도 중고등학교 내내 이랬기에.. 이 짤을 볼 때마다 찔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짜가 나타나면 비웃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