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중 하루, 하루에 2시간이 주는 것
지금에야 이것저것 하다 보면 그것이 이리로 뻗고 저리로 뻗어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 알게 됐지만, 지망생일 때에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나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힘들어했다.
-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 / 반지수
거창한 것도, 커다란 비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말 의도하지 않았던 시작이었다. 그림을 그리게 된 건, 자연스럽게 펼쳐진 길이었다.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내기보다는 아웃풋을 하나라도 내볼까 싶어서 시작했던 1 그림 챌린지였다. 손그림으로 인증해도 상관없었지만 캐릭터를 만들고 이모티콘을 만들어보겠다고 인테리어 소품처럼 한 구석에 있었던 아이패드를 사용했다. 디지털 드로잉에 재미를 붙이며 점점 완성도를 높여가면서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고, 그 아쉬운 마음이 불러왔던 건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처음 미술을 시작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이 유화나 수채화 등 화려하게 색감을 펼쳐놓을 때 열심히 선 긋기를 했다. 선 긋기가 지루하지 않다는 걸 처음 느꼈고,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던 정물화 표현이 재밌었고 사람을 표현하는 크로키는 더 신났다. 그 시간들이 모여서 그런지, 일주일에 하루이자 하루에서 2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르게 느껴졌다.
다른 때와 달리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이 아니었다. 온전히 몸을 맡기면서 그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최근에 이렇게까지 몰입했던 시간이 있었나?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었던 시간이 오랜만이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물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고 그 2시간이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사진 찍어내듯 완벽하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아니었고, 내 삶이 거창하게 바뀐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온전히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냈다는 것뿐.
그런데 그 시간이 오늘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다르게 그려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이렇게 집중을 할 수 있구나- 알게 됐고, 열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도, 그 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뭔가를 하려고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이런 게 또 다른 길이 열린다는 의미가 아닐까?
크로키를 배우면서 느낀 건, 그림 역시 단계가 있다는 거였다. 사람의 비율을 맞추고, 관절과 뼈대를 그리고, 그 위에 근육과 살결을 표현하고, 그 위에 옷을 입힌다. 그리고 그때부터 더 세밀한 표현을 잡아간다. 밀도를 올리고 명암을 표현하면서 조금 더 깊이감을 주기 시작하는데 선을 표현할 때마다 달라지는 걸 보면서 감탄하게 되고 더 빠져들게 된다.
세밀한 표현도 좋지만 첫 시작에 따라 달라져서 기본이 되는 비율과 뼈대가 중요했다. 그 시작에 따라 그리고 싶은 방향대로 안 되고 이상해지기도 하고, 오히려 살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완벽할 수는 없다.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나아가는 속도도, 원하는 표현방법도 다르니까. 그래서 그림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내 특징을 잘 드러낼 수도 있어서.
그리고 첫 표현을 못 했다고 해도 그다음 표현이 있고, 또 다른 그림이 펼쳐지면서 점점 더 나아진다. 처음 크로키를 그렸을 때보다 오늘의 크로키를 더 잘 그린 것처럼.
그러니 첫 시작이 잘 못 됐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못 된 게 아니라는 걸, 첫 그림을 그리면 또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고 또 다른 그림이 새로운 그림을 불러오는 것처럼. 나도 계속 나아가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오늘의 크로키를 마무리하면서 정리해 본다.
일기일회, 오늘의 한 줄 : 오늘은 글이 진짜 안 써지는데, 다음에는 더 잘 써지겠지. 다음 주부터는 이제 얼굴 표현 들어간다, 기다렸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