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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fferent Doors Aug 17. 2019

진짜 방과 후 학교를 고민해야 될 때

[이문238 | 두 번째 이야기]


최근 보았던 흥미로운 뉴스 하나. 개인적인 관심사이기도 한데요. 미국의 차량 호출 서비스 ‘우버(Uber)’ 가 헬리콥터를 택시로 공급하는 ‘우버 에어(Uber Air)’를 2020년부터 미국과 호주 일부 도시에서 운영한다고 합니다. 아직은 헬리콥터 운전사가 운영하지만 종내에는 ‘무인자율비행 서비스를 하겠다’고 말하며 우버 에어 승하차장(Skyports), 그러니까 전에 없던 건축물까지 상상해보는 실험에 나섰습니다. 고작(!) 도로를 누볐던 ‘차량 호출 서비스’가 단숨에 하늘을 무대로, 드넓은 땅을 무대로 사업을 벌리고 있는 거지요.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우와, 이제 산업의 경계란 없구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이 밑천이고 재주겠다’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럼 나는 무엇으로 먹고살지?’하는 생각이 뒤따랐습니다. 이렇게 택시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인공지능(AI)이 소설을 쓰는 마당에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익히고) 있는지 아주 짧은 순간, 자괴감이 불쑥 들었습니다. 마치 조명을 켜듯이 상상력 모드를 가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초중고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님은 더욱 걱정이 앞서리라 생각합니다.


하늘을 나는 택시! 곧 여러분의 일상에 불쑥 들어올지 몰라요.  ©Uber


무크(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라고 들어보셨지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이 되는 곳이라면 그 자리에서 옥스포드대, MIT대 등 전 세계 유명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입니다. 한국에서는 2015년 K-MOOC 가 생겼고 현재 96개 국내외 기관의 강의를 선보입니다. 교육계에서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또는 ‘교육혁명이다’라고 말하며 그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제 누구라도 관심사에 따라 어느 곳에 있는 지식이든 접근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따라 ‘어느 학교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자기만의 고민거리’를 탐구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이 이럴진대 객관식 정답을 요령껏 고르는 것, 높은 점수를 받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학습 방식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현실, 저만의 생각은 아니겠죠?



오늘날의 공부, 누구를 위한 건가요?


‘학교 수업 필요 없다, 학원서 정시 올인하는 고등학생’이 늘고 있단 기사를 봤어요. 아이들에게 학교란 그저 대입을 위한 계단 하나쯤이 된 것 같아요. 어쩐지 씁쓸해요. 학교에는 ‘내신 점수’보다 더 중요한 배움이 있는 것 아닌가요?

이재준: 학원이 학교를 대체하는 상황까지 왔어요. 여기까지 이른 데에는 굉장히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 있어요. 저도 학부모라 교육에 관심을 갖고 보니까, 일단 먼저 의외로 많은 분들이 ‘문제는 학교야’라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학교가 문제일까?’, ‘그럼 학교란 어떤 곳일까?’하고 그 뜻을 거슬러 올라가 찾아봤어요.

에디터 님은 ‘학교’란 공간이 맨 처음에 어떻게 생긴 줄 아세요?  ‘학교(School)’란 낱말은 그리스어 스콜레(Schole)에서 출발했어요. 이 단어의 뜻은 편하게 모여 놀고 대화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해 교류가 핵심인 거죠. 소위 전문가(Professor), 앞에 나서서(Pro-) 말하는(fess) 사람(or), 즉 수많은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 지식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장소, 그게 학교가 생긴 배경이었던 거예요. 전문가의 말을 듣고 배우려 오는 사람이 학생이었고요. 그러니까 ‘학교’는 배우는 것도 즐겁고 가르치는 것도 즐거운 만남과 교류의 공간이었던 것이에요.


지금 우리 곁의 학교 모습은 그 뜻(취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이겠군요.

이재준: 네. 그러다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해요. 수단의 합리화, 전문화를 위해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도 파편화, 시스템화 되어 간 거죠. 그러면서 보편적이고 평범한 정보를 균등하게 가르치고 평가하는 시스템이 발달했어요.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어요. 재미있는 건 그 출발은 같았을지라도 1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각국의 교육 모습이 서로 달라져요. 각자가 배움에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믿음이 있거든요. 살짝 말씀드리면 영국은 교양으로서의 삶의 태도를 강조했고, 프랑스는 개인으로서 사고하는 힘을 키웠어요. 미국은 새로운 시도를,  싱가포르는 우수한 사람을 더욱 우수하게 하는데 집중했죠.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 김선 박사님의 『교육의 차이』(도서출판 혜화동)인데, 이 책 한번 읽어 보시면 각국의 교육이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진화했나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나라는요?

이재준: 경제성장이 우선이었죠. 산업의 고도화를 위해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린 거예요. 그리고 ‘잘 만들어 잘 파는데’까지 왔어요. 그런데 이제부터 질문이 나와요. ‘그래. 그럼 그다음은?’ 이게 난감한 거예요. 모두가 느끼다시피 예전에 알던 산업구조가 아니잖아요. 기존의 모든 것들이 요동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굉장히 당황스러운 거죠. 더욱이 우리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교육과정은 일관된 철학 없이 해마다 바뀌었지, 학교에서 선생님 교권은 추락했지, 학부모님들은 애들 좋은 학원 못 보내 안달이지. 학생과 선생 사이는 어떨 것 같아요? 서로를 향한 믿음과 신뢰가 무너졌어요. 저희는 이런 상황에 어떤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의 '교권'의 이미지는 오늘 이렇습니다. ©구글 이미지 검색 갈무리



저도 얼마 전 ‘교권침해 보험 상품 인기’란 기사를 보고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말씀하신 대로 가장 큰 문제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 믿음이 고갈되어 버린 것이에요.

이재준: 시대가 달라졌어요. 옛날처럼 선생님으로서 한 사람의 소명의식, 사명의식에 기댈 수 없어요. 이제는 시스템과 분위기 그 자체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대안을 찾아야 된다고 봐요. 하지만 그 고리를 푸는 건 쉽지 않죠. 부모님도 다 알고 계세요. 그럼에도 자신 있게 “너 학교 가지 마!” “너 학원 안 가도 돼!”하고 말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아이들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는 여러 경험의 창구를 마련해 다양한 어른(선생님)을 만나게 하고 싶어요. “아! 이런 선생님(어른)도 계시는구나!” 이런 말이 아이에게서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 교육의 주도권을 아이에게, 아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른(선생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재준: 아이에게는 세심한 관찰자가 필요해요. 만약에 아이가 수학을 좋아한다, 그러면 이 아이가 수식을 좋아하는 건지, 숫자가 좋은 건지, 정답 찾기가 좋은 건지 이걸 발견해 줄 수 있는 어른이 곁에 있어야 해요. 교육, 그러니까 에듀케이션(Educ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에듀케어(Educare)에서 왔어요. ‘밖으로’를 뜻하는 ‘e-’ 접두사에 ‘이끌어내다’란 ‘ducare’를 붙인 거죠. 그러니까 ‘교육’은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것’이 본래 뜻이에요. 특히나 아이가 저학년일수록 이런 시간이 더 필요하고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초등학생 때 만나는 선생님이야말로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켜봐 주고 끌어내 주는 전문가여야 한다고 믿어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우리는 반대로 지금 집어넣기 바쁘잖아요. 아이의 속을 끄집어내는 데는 신경 쓰지 않아요. 물론 부모님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이기도 하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그럼 누가 그 역할을 해줄까요? 지금 그 자리가 비어 있어요.


특히나 교육이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높아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말씀하신 것 또한 ‘퍼스널 브랜딩’이 강조되는 요즘 시대에 꼭 필요한 발견이란 생각이 들고요.

이재준: 요즘에 ‘4차 산업혁명’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시잖아요. 이건 검증되지 않은 ‘4차 산업’과 ‘혁명’이 결합된 단어라 저는 개인적으로 그 쓰임을 동의하진 않아요. 그래서, 전 시대별로 나타났던 ‘산업의 발달’이나 ‘사회적 혁명’이 아니라 그때마다 주목했던 ‘인간형’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세대별 인간형, 이건 제가 강구해낸 말이에요. (웃음) 말하자면, 1세대 인간은 재료 혁명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고자 기구(농사용, 전쟁용)를 만들고 익히는데 몰두했어요. 2세대 인간은 산업혁명 속에서 기계공학에 이목을 쏟았지요. 3세대 인간은 정보혁명, 그러니까 컴퓨터 안의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프로그래밍)가 중요했어요. 이제 4세대 인간에 주목해야 하는데 한 번쯤 들어봤을 거예요. 로봇, 인공지능과 시간을 함께 하죠.

이런 비행기를 훗날에는 자가용마냥 타고 다닐 수 있어요.     ©이문238

그런데 분명 앞선 논리라면 ‘로봇공학’을 떠올려야 하는데 말이죠. ‘정말 로봇을 어떻게 만드는지가 중요해질까?’ 궁금한 거죠.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20살, 30살 됐을 때를 상상해보세요. “시리(Siri)야~ 불 꺼줘.” “지니(Genie)야~ 예약해줘.”하고 말할까요? 아뇨. 오히려 시리나 지니가 “몇 시부터 조명을 켤까요?” “가는 길을 안내할까요?”라고 질문할 거예요. 이때 우리(사람)는 로봇의 질문을 인간의 사고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해요.

그래서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결정하는 경험을 일찍이, 그리고 충분히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결정하고 시킨 일을 로봇처럼 정확히 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어요. 만약 그 조차도 로봇이 더 잘하면? 사람은 퇴보하는 거죠.




지금 사고력, 그러니까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잘해 봤자 ‘로봇’ 같은 사람이 되겠네요. 그런데 그 사고력이란 게 어릴 때만 생기나요?

이재준: 사고력과 판단력은 어느 한순간에 쌓이지 않아요. 운동을 해서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연습과 경험과 자기 훈련의 과정이 쌓여야 해요. 그중에서도 저는 초등학교 4~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이 놓치지 말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옛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요즘은 4학년 버릇이 서른까지 가는 것 같아요. (웃음)

또 하나, 옛날에는 또래 안에서만 자기 정체성을 찾았는데 요즘은 달라요. 정보의 홍수 시대니까. 아이들이 어른이 보는 모든 정보에 함께 노출되어 있잖아요. 이렇게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자기 안의 질문을 제대로 고민하지 못하면 “이건 뭐지? 저건 뭐지?” 하다가 결국 “뭐지?”만 남게 되는거예요. 더군다나 물음표는 계속 쌓이는데, 공부해야 하니까 답을 궁리할 시간이 없어요.

질문의 핵심은 호기심이에요. 궁금하니까 물어보는데 우리 사회는 질문할 틈을 쉽게 주지 않죠. 아이들끼리도 질문이 틀렸네, 유치하네 지적하잖아요. 그럼 아이들이 어디 가서 질문하겠어요? 그러는 와중에 부모님께서 “중학교 가서 공부 안 하면 고등학생 때 따라 잡기 힘들대”하시니까 막연한 공포심에 휩쓸려서 “아, 공부만 해야겠구나” 한다고요. 결국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을 외우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의 삶에서 너무도 중요한 시기가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거죠.


하버드대학교보다 입학 경쟁률이 높다는 ‘미네르바 스쿨(Minerva Schools)’의 켄 로스(Kenn Ross) 아시아 총괄이사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직업에도 어울리는 사람”을 키우겠다며 “우리는 지식보다 지혜를 가르친다”라고 말한 바 있어요. 이 역시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아요.

이재준: 인공지능과 로봇이 향하는 목표점은 ‘가장 사람에 가까운’ 일 것이에요. 하지만 절대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사람에게 필요한 능력은? 진짜 사람의 감정과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팀장의 역할을 상상해 보세요. 팀원의 능력치를 제대로 파악한 다음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이 잘 작동할 수 있게끔 인력을 배치하여 팀의 성과를 높이는 일을 하잖아요. 그처럼 우린 상황을 매니징(Managing) 할 수 있는 판단력을 키워야 해요. 저는 우리가 딱 그 전환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 같아요.





변화의 물살이 우리 턱 끝까지 차 올라왔음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이전처럼 문법과 공식을 암기하는데 쏟는 에너지가 정말 가치 있는 건지 스멀스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한번 다 함께 멈춰 서서 아이들의 시간을 제대로 살펴봐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 더 궁금해지는 건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토록 아이들을 위한 공간과 시간에 인색했는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정말로 여태껏 대안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지’, ‘있었다면 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는지’를 말해보겠습니다. 속상해도 냉정히 현실을 바라봐야 그다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누가 아나요.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나갈지! ©이문238

이문238, ‘아이들의 작업실’이란 엉뚱하고 기발한 장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부적-외부적 상황에 기대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시간, 조금 다른 기회의 문을 여는 데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함께 들어주세요. 하나씩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연재 형식입니다. ‘구독하기’ 버튼으로 새 글 소식을 받아보세요!


에디터/윤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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