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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fferent Doors Aug 07. 2019

우리에겐 다른 문이 필요하다

[이문238 | 첫 번째 이야기]

교문을 나선 아이가 매고 있는 가방이 들썩일 만큼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도착한 곳은 초등학교 바로 옆 건물. 햇살처럼 환한 얼굴로 대문을 열어젖히는데 마치 좋아하는 친구라도 만나기로 한 마냥 신나 보입니다. 문을 여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는 것. 우리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곰곰이 뜯어봐야 합니다. 우리 아이가 언제 이렇게 기분 좋게 저 너머의 세계를 받아들이는지 그 순간을 발견해주고 응원해주는 게 어른의 몫이니까요.


아이가 기쁘게 문을 연 이곳, 이문238입니다. 동대문구 이문동 238번지에 있습니다. 바깥에서 보는 생김새는 여느 카페와 비슷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섭니다. 먼저 간판이 없습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이름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가 깨끗합니다. 그 안은 더 별납니다. 카페라면 모름지기 알록달록한 소파와 테이블로 가득 차야 할 텐데, 반절은 유리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데다가 심지어 'No Adult’라고 적힌 알림판이 붙어있습니다. 유리문 안쪽으로는 듬성듬성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고, 어릴 적 미술실에서 봤을 법한 각종 만들기 재료가 다채롭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에는 관리자 즈음으로 보이는 어른 한두 명이 있을 뿐 아이들은 저마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무언가를 만들기 바쁩니다.


새하얀 띠를 머리에 두른 것 같은 공간이 이문238의 얼굴입니다. 뒤편에 솟은 건물은 이문초등학교입니다. ©이문238
바빠 보이죠? 저마다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그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문238


사실 제가 처음 이문238을 만난 건 2017년 10월, ‘2017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 전시에서였습니다. ‘공동체/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우수상을 받았는데, 그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글에 감탄했더랬습니다. ‘어린이와 가족 중심의 커뮤니티 공간’인데, ‘궁여지책으로 학원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지식을 활용하고 표현하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두가 문제라고 알고 있음에도 바꾸려는 노력은 적지 않았던가?’ 반성하는 그 순간, 이처럼 메마른 선택지에 번뜩하고 나타나 “다른 길로 가보자!” 외치는 선봉장은 누구인가 궁금해졌습니다.


여기는 리마크프레스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의미 있는 공간과 장소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이야기꾼의 사무소입니다. 대표인 이재준 선생님은 기획자이자 건축가인데, 그 활동의 폭이 참으로 다채롭습니다. 멀게는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전시 큐레이팅(2004, 2006, 2008), 가깝게는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 기획,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함께 추진한 ‘녹사평역 공공미술 프로젝트’ 큐레이팅(2019) 등을 했습니다. 이처럼 큰 도시를 무대로 활발히 활동해온 그가 한 동네에 그것도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문238의 첫인상, 도대체 여기는?


앞으로 대표님이라 부르겠습니다. 도대체 이문238은 어떤 곳입니까? 번듯한 간판도 하나 없습니다.

이재준: 아, 간판은 일부러 걸지 않았어요. 이 공간 자체가 아이들이나 주민들에게 소중한 아지트로 여겨진다면 간판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처음 만들 때부터 오랫동안(이문초등학교가 없어질 때까지!) 사랑받는 공간으로 자리 잡길 바랐어요. (웃음)

이곳은 쉽게 말하면 ‘아이들의 작업실’이에요. 제가 가진 질문은 단순했어요. ‘아이들이 학교가 끝난 뒤에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학교 앞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시간을 보낼 공간을 만들어준다면 아이 일상이 어떻게 바뀔까?’ 였지요. 그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니 이문238이 생겼어요. 2017년 1월에 문을 열었으니 햇수로 3년째가 되어가네요.


그렇게 아이들을 향한 질문을 시작한 배경이 있나요?

이재준: 저는 세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지만, 본디 아이들을 참 좋아해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절 쳐다보면 얼마나 이쁜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웃음) 정말 순수하고도 새로운 세계예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하다못해 가까이 있는 우리 아이의 친구나 이곳에 놀러 온 아이만 보더라도, 지금의 교육 환경이란 게 턱없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해요. 옆집 친구도, 반 친구도 다들 ‘학원 2개 다닌다’, ‘3개 다닌다’ 하니까 그럴 생각이 없던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계속 따라가요. 맞벌이 가정이라면 선택의 폭은 더 좁아지죠. 아이와 함께 있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사이에서 아이들은 점점 지쳐가요. 새싹이 가져야 할 파릇파릇한 힘을 잃어간단 말이에요.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요? 이제까지 제가 해온 일이란 게 보이지 않는 일을 기획하고 기획한 내용을 공간으로 담아내는 것이었어요. 이문238은 그런 경험과 질문이 숙성되어서 만들어진 공간이자 이야기예요.


그렇군요. 차근차근 뜯어볼 지점이 많아 보이지만 일단 먼저 드는 질문부터 할게요. 그러니까 여기서 아이들이 '작업'을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재준: 이곳에 처음 온 어른들 대부분이 "아이들이 무슨 작업을 한다는 말이야?”하곤 물으세요. (웃음) 아직 많은 분께 ‘작업’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한 것 같아요. 도대체 뭘 만든다는 건지, 그래서 만드는 게 왜 중요한지 아리송한 거죠. 저는 건축학과를 졸업했어요. 건축학과에서는 작업은 생각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스스로 만들어보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생각을 듣고 다시 고민해보는 과정이 끊임없이 일어나요. 매 수업 시간마다 있죠.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1년 동안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데 이 과정 자체가 배움이었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곳에서는 무엇을 완성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가는지가 중심이 되죠. 여러 재료를 섞어서 어떤 물체를 만들어도 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좋아요. 영상을 찍어도, 녹음해도 좋죠. 가만히 앉아서 명상할 수도 있고, 춤을 출 수도 있어요. 아이의 마음대로 그 표현 방식의 틀은 언제든 바꿀 수 있어요. ‘무엇을 만들겠다’ 또는 ‘이렇게 해볼까?’하고 정하고, ‘어떻게 해보겠다’ 정리하고, 스스로 실행해(만들어) 보는 모든 과정이 작업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도 어릴 때 신나게 했던 일들이에요. (웃음)


색연필, 크레파스, 마카, 색지, 종이컵, 포일, 비닐봉지 등등 없는 거 빼곤 다 있습니다. ©이문238
오늘 쓸 재료를 골라 자리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친구와 의논하기도 비교하기도 하면서 작업을 발전시킵니다. ©이문238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이 ‘제대로’ ‘놀아보는’ 곳 같아요. 그러니 아이들의 만족도도 높아지는 것 같고요. 특히 친구들이랑 이곳에서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다들 학원 가야 해서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고들 하는데 이문238에 오면 친구도 만나고 내 작업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재준: 맞아요. “너는 뭐 만드니?” 하고는 슬쩍 어깨너머로 서로의 작업을 구경하다 보면 “나는 이렇게 해봐야지”가 되거든요. 그 과정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일어나요. 그리고는 “우리 다음에는 저렇게 해볼까?” 이래요. 어른들이 따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대화하면서 과정을 발전시켜나가요. 신기하죠. (웃음) 특히 저희가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이라고 꼭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아이 한 명이 아니라 아이들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죠. 서로를 보면서 모르던 것을 배우고, 그러면서 성장하고, 한 단계 성숙해지는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게 건축학과의 작업실이 진짜 학교였던 이유는 그 안에서 만난 동기, 선후배들과의 교류를 통해 저 역시도 성장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매니저님께서는 아이들을 지도해주지 않으시나요?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나요?

이재준: 이곳에서 매니저의 역할은 관찰자예요. (아이들은 ‘샘’이라고 불러요. 일본어에서 볼 수 있는 ‘- 짱(-잔, ちゃん)’이란 쓰임처럼 나이와 관계없이 동경하고 좋아하는 친구 같은 역할이죠. 아이들에게 샘물 같은 존재가 되길 바라기도 하고요.) ‘아이가 주인공’이라고 말하듯이 이곳에서는 아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해보는 게 중요해요.

생각해보세요. 아이가 하루를 보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이들도 ‘나의 시간을 마음대로 쓰는 일’, 한 발 더 나가서 ‘나의 시간을 의미있게 쓰는 일’이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 경험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학교, 학원, 집 모두 선생님과 부모님의 지도, 심하게 말하면 그늘 아래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경험을 못 해요. 그러면서 타인에게 확인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상황에 점점 익숙해지죠.

그래서 저희는 이곳에서만큼은 스스로 사고해야 한다고 정했어요. 그래서 ‘No Adult’ 예요. 대신 샘들은 아이가 도구 사용에 익숙하지 않을 때 도와주거나 질문을 먼저 가지고 왔을 때 함께 답을 찾는 시간을 보내요.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원칙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배려가 느껴집니다.  ©이문238


우스갯소리로 ‘어른보다 애들이 더 바쁜 시대’라더군요. 대치동 학원가에는 메뚜기처럼 학원에서 학원을 데려다주는 셔틀버스도 인기라고 해요. 이곳에는 어떤 아이들이 오나요?

이재준: 2014년도 <어린이 문화와 생활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초등학생이 방과 후 ‘가장 많이 하는 활동’이 ‘학원 가기’라고 해요. 그런데 이 ‘학원 가기’가 방과 후 ‘가장 즐겁게 하는 활동’을 묻는 말에 꼴찌를 차지했어요. 그러니까 ‘가장 좋아하지 않는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란 거죠. 아이들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방과 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에요. 여기서 드러나는 여러 문제는 한 개인(가정)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이문238에 오는 아이들도 대부분 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학원과 학원을 옮겨가는 그 틈 사이에 10분 동안 자기 걸 만들고 가는 친구도 있지요. 아이들을 크게 나누면 초등학교 저학년 그룹과 고학년 그룹이 있는데 아무래도 학원의 틀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저학년이 자주 오고, 고학년 그룹은 학원 가기 전에 많이 들려요. 더 많은 아이가 더 다양한 기회를 얻도록 하는 게 앞으로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죠.


우리 아이들이 말한 데이터입니다. 어른들은 이를 세심히 헤아려 아이들의 메시지를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문238


말씀하신 대로 아이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얼마나 선택지가 빈약했는지 돌아보게 되네요. 그렇다면 3년간 운영하시면서 직접 체감한 변화가 있나요?

이재준: 분명히 있어요. 재미난 이야기 하나 먼저 해드릴까요? 한날, 부모님 손을 잡고 한 아이가 찾아왔어요. 부모님 얼굴에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우리 아이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요?" 하시죠. 아이를 작업실에 들여보내고도 눈을 못 떼세요. 아이도 처음에는 낯설어서 작업실 문에 들어서면서 한번, 재료 고르면서 한번, 자리 앉으면서 한번 부모님을 슬쩍슬쩍 쳐다봐요. 그런데 아이는 놀랍도록 상황에 금방 적응해요. 옆에 앉은 친구가 만드는 거 따라 만들어보고, 자기 나름대로 덧붙여 보기도 하고. 그러는 순간부터 부모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쳐다볼 생각도 안 해요. 이제 관심이 없어진 거지. (웃음) 그때 아이가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하는지 아세요? 얼굴에 막 호기심이 가득 서려있어요. 여기에 더 재미난 게 부모님의 반응이에요. 처음에는 아이가 더 이상 자기를 찾지 않으면 서운해하세요. 그런데 그다음은 어떤 반응인 줄 알아요? "우리 아이가 이렇게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하곤 놀라세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이제 내 시간을 보내볼까?"소리가 나와요. 그때부터 아이도, 부모님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여태까지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없었던 거죠. 이문238이 만들고 싶은 다양한 기회에는 어른을 위한 변화도 분명히 함께 있어요.


이문238,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이문238’은 동네 이름에서 따왔지만, 한자를 살짝 바꿔 표현해봤어요. 마을 리(里)+문 문(門)에서 다를 이(異)+문 문(門)으로. 그러니까 238개의 서로 다른 문이랄까요. 영어로 말하면 ‘Different Doors’. 우리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238개의 다른 가능성을 만나길 바라요. 그리고 그 다양한 문이 아이들의 속에 있는 진짜 관심, 진짜 취향이 흘러나오는 통로가 될 것이라 믿어요.




순간, 이문초등학교 아이들이 부러워졌습니다. 언제든 찾아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신들의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지 어른이 된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문238은 이렇게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익숙했던 것들을 뜯어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먼저 현실을 제대로 봐야 그 다음을 물을 수 있겠죠. 저는 다음 시간에 한번 더 요즘 아이들의 공부에 대해 물으려고 합니다.


똑같이 생긴 쿠키는 가라! 내가 좋아하는 모양으로 색깔로 디자인해보는 중입니다. ©이문238



이문238, ‘아이들의 작업실’이란 엉뚱하고 기발한 장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부적-외부적 상황에 기대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시간, 조금 다른 기회의 문을 여는 데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함께 들어주세요. 하나씩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연재 형식입니다. ‘구독하기’ 버튼으로 새 글 소식을 받아보세요!


에디터/윤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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