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화의 네 번째 레터
연아! 오랜만이다.
최근에 나는 20일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 친구들이 어땠는지 물어봐도 말재주 없는 내 입에서는
‘좋았지!’ 같은 대답밖에 안 나오더라. 다른 대륙으로 길게 떠나본 적은 처음이라 소회가 깊어서 글로 남겨보려고 해. 얘깃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라 연작으로 쓸 예정이야. 읽으면서 궁금한 점 생기면 언제든지
답장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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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으로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는 말 들어봤어? 낯선 땅에 발을 디디면 처음 맡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생소한 언어가 귀를 스치지. 적응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내게 이런 감각도 있었나?’ 싶은
순간이 불쑥 찾아와. 마치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을 운동하면서 발견하는 느낌이야. 찌릿한 근통도 잠시, 새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설레기 시작해.
첫 도시였던 파리는 아이 모드로 돌입한 내게 테마파크나 마찬가지였어. 다양한 피부색, 그보다 더
다양한 옷차림, 영화에서만 듣던 'Bonsoir!' 'ça va?' 'Pardon' 동경했던 테라스 커피타임까지. 목젖과
공기를 마찰하며 서툰 불어를 뱉는 내 모습이 웃기고 신기하더라. 반나절에 네댓 번씩 바뀌는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아끼는 재킷이 젖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좋았어. 길에서 본 대부분의 사람은 우산을 쓰지
않았고, 나 역시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싶었으니까.
처음 써본 근육에 무리가 간 탓일까? 피렌체에서는 내내 앓기만 했어. 지독한 미세먼지로 눈병은 기승을 부리지, 말랑한 신발 밑창은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곧이곧대로 전달하지, 바글바글한 관광객 무리는 두통을 부르지... 축 처진 나 때문에 함께 간 엄마와 동생만 고생했지 뭐. 그때부터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짙게 배더라. 고대하던 여행지에서조차 센티멘털함에 사로잡히는 내 모습이 싫었어.
이쯤에서 밝히자면, 나는 자기 성찰이 주특기라 메타인지를 잘해. 그 덕에 내 강점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지만 반대로 고치기 어려운 약점에 대해서는 몸서리치기도 하지. 나의 가장 큰 약점은 예민함이 패시브 스킬이라는 거야. 잘 사용하면 유용한 ‘스킬’이긴 한데, 하필 ‘패시브’다 보니까 피통이 너무 빨리 깎이는 게 문제야. 내게 이런 패시브 스킬이 장착돼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전장 한가운데였어.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는 설렘은 어느새 나라는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는 낙담으로 이어졌어. 유럽 여행 정도 오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맛있는 거 먹고 예쁜 거 보고 사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게 다라니. 이 정도 행복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거든. 그렇게 며칠을 가라앉아 있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어. 시간이 아깝더라고. 그래서 액티브 스킬을 켰지. 그래 그거, 자기 성찰!
가족에게는 하루만 혼자 놀겠다고 선포했어. 다뉴브강을 왼쪽에 끼고 걸으면서 어떤 순간이 가장 인상적이었는지 곰곰 되새겼지. 친절했던 웨이터의 눈빛, 소녀처럼 들뜬 엄마의 발걸음, 영화 속 명장면을
흉내 내던 연인의 웃음소리가 떠오르더라. 거기서 느꼈던 고양감을 언젠가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이어졌어. 그때 다시금 확신했지. 나라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행복이 아니라 영감을 얻고 글
쓰는 일이라는 걸.
내게 행복은 목표로 향하는 과정이나 일상생활에서 운 좋게 얻어지는 거야. 행복하면 좋지만, 그게
삶의 전부는 아니지. 오히려 나는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깊이 교류할 때, 거기서 얻은 단상을 글로 쓸 때, 완성된 글이 쌓이면서 나라는 사람이 언어화될 때 삶이 유의미하다고 느껴. 여기까지 성찰이 미치자,
매 순간 행복하지 않은 여행이라도 괜찮다는 결론이 나더라. 내가 목표했던 영감은 얻었으니까 말이야.
획득한 문장들;
물 1L는 안 넘어가도 흑맥주 1.5L는 거뜬히 비워지는 걸 보니 맥주는 물보다 공기에 가깝나 보다.
예민하면서 모질지도 못할 바엔 성질부리지 말고 해탈하는 편이 낫다.
노을만 예쁘다면 피사든 프라하든 서울이든 전주든 언제든지 반할 준비가 돼 있다.
여행가의 낭만보다 직업인의 따뜻한 인간성에 더 눈길이 간다.
앞으로는 허황된 동경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쌓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고 싶어. 작게 행복하고 크게 깨닫자는 인생 지론으로 봤을 때 3주는 길고 일주일이면 감지덕지하겠지. 여행하며 새로 배운 단어, 음식, 풍경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글감으로 태울 거야.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게 지겨워지면 여행보다 긴 여생을 위해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서 살아야겠어. 새로운 일상과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
p.s. 물도 음식도 시차도 잘 맞았던 내가 유일하게 향수를 느낀 건 모국어야. 나는 김치찌개보다
한국어를 더 사랑하는 사람인가 봐. 이건 좀 새로운 발견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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