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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Jun 06. 2024

"내가 뭘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어"

다야의 네 번째 레터

 


연아! 네 번째 편지로 인사하네.






#

3주에 한 번 편지를 쓰는 셈이니, 레터어리가 시작한 지도 벌써 12주는 지났다는 뜻! 뜨내기 레터의 필진은 여전히 연이들에게 보내는 레터의 '발송하기' 버튼을 누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몰라. 레터어리를 구독해 준 연이들에게 또 어떤 흥미로운 전시 이야기를 들려줄지... 최근 2주간은 딱히 나를 훅 끌어당기는 전시가 없어서 고민이 됐거든. 하릴없이 시간은 흐르고, 나는 여전히 적당한 전시를 찾지 못해 '이번엔 전시가 아닌 다른 콘텐츠를 써볼까' 생각했었지.


그런데 인스타그램에서 일민 미술관의 광고를 보고 이거다! 싶더라고.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일민미술관
기간 4.12-6.23
도슨트 금, 일 15:00
소요시간 60분 내외



영원주의(Foreverism)’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지 않은 시대나 대상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사회, 문화, 정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뜻합니다. 이는 과거를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 그로부터 영감을 얻는 것에서 나아가 무엇도 종결되지 않는 특유의 상태를 유발합니다. 《포에버리즘》은 우리 삶에 나타나는 영원주의의 징후와 그에 답하는 동시대 시각 문화의 모습을 탐색합니다.


전시 정보 보러 가기




♫•*¨*•.¸¸♪✧








언젠가 발견해서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던 짤. 저런 감상이 나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니라니, 내가 느낀 감정을 적확하게 담고 있는 듯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나. 얼마 전 이 짤을 우연히 다시 열어 봤었는데, 이것과 이번 전시가 딱 맞아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어.


'포에버리즘(영원주의)'이란 뭘까? 문화비평가 그래프톤 태너가 작년에 출시한 책의 제목이자, 우리말로 '향수', '그리움'을 뜻하는 '노스탤지어'가 현대 문화, 미디어의 영향에 의해 작동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새로운 문화 비평 용어야.


'노스탤지어'는 원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유산, 즉 고향의 정취나 정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했어. 하지만 전자 기기와 클라우드에 모든 것을 저장할 수 있는 현대 사회가 도래했고, 과거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 갤러리, 클라우드를 열어 보면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의 형태를 띠게 됐어. 핸드폰 갤러리에 예전에 찍어둔 사진이나 동영상이 잔뜩 있지만, 정작 너무 많아서 열어보지 못할 때가 더 많지 않아? 그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언제든 열어볼 수 있기에 오히려 등한시하게 되기도 하지. 그 과거는 내 저장 공간 안에 '영원히' 존재할 거란 믿음을 주기 때문이야. 이럴 때, 우리는 언제든 열어 볼 수 있는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까, 아니면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두며 끊임없이 열어보는 것을 보류하게 될까?








포에버리즘 Foreverism



과거를 감각하는 방법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주게 돼.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호명되며 '스핀오프'라는 이름 하에 우리 앞에 나타나. 

과거의 영광을 등에 업고 그 세계관을 확장하는 거지.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이후에 나온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는 다 챙겨보지 않았어. 해리포터 세계관이 확장되긴 했지만, 글쎄. 영화 기준으로 해리포터 1편이 세상에 나온 지 한참 후에 만들어졌음에도 어쩐지 작품의 질은 퇴보했다는 

인상을 받았거든.


그래프톤 태너는 이 점에 주목했어. 과거의 향수에 부응하며 현실에 나타난 문화의 잔여물들은 그 질이 

대개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고 봤어. 그것들은 계속해서 나타나지만 사람들을 질리고 지치게 만들어. 최근 몇 년간 마블의 영화가 부진한 것도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아무도 과거의 IP를 그리워하지 않게 돼.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는데 대체 누구를 위해 스핀오프들이 나오는 걸까?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인 인식의 조작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트럼프가 지칭하는 과거는 언제인가' 등 수많은 

물음표를 만들어 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도록 돕는 역할을 했어. 실체 없는 '과거의 미국'을 우리가 '그리워하고 있었다'라는 착각을 하게 하거든. 여기서 노스탤지어의 역설이 생겨나. 과연 우리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현재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앞에 등장하는 과거를 호명하는 콘텐츠들이 우리에게 노스탤지어를 강제하는 것일까? 근원이 소거된 실체 없는 그리움이 

우리의 인지 체계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해.


그래프톤 태너의 포에버리즘은 이렇듯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이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연결하고 잇는지, 인간의 의식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탐구한 저서야. 이걸 이해해야 전시의 기획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이거든! 그래서 연이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어. 고작 서론일 뿐인데 논문을 읽는 것 

처럼 재미가 없었다면 미안... 나 너무 오버했나...





♫•*¨*•.¸¸♪✧




지금부터는 전시를 관람하며 내 기억에 꼭 남았던 작품들 딱 세 개만 핵심적으로 보여줄게! 이 전시는 총 12팀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전시라서, 각 작가의 고유한 작가 정신과 테마를 파악하며 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어! 금, 일요일에 진행하는 도슨트도 꼭 들어보길 추천할게.





스티브 비숍
<스탠더드 발라드>는 개인과 국가에 의해 다양한 층위에서 변주되는 노스탤지어의 감각을 탐색한다. 작가는 1980년 소련의 모스크바 올림픽 폐막식을 담은 비디오 푸티지에 2000년대 미국 팝 가수 노라 존스(Norah Jones)의 곡을 삽입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은 공산주의 국가가 최초의 올림픽 주최국이 된 사례로, 냉전시대 양 진영이 서로의 올림픽을 보이콧한 갈등의 시초가 된다. 미국을 비롯한 60여 개 국가가 보이콧한 이 행사는 불명예스럽게 파행에 이르고 공산주의 진영과 서방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다. (이하 생략) 
출처: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일민미술관





스티브 비숍의 <스탠더드 발라드>는 소련의 올림픽 폐막식 영상과 2000년대 미국의 재즈 가수의 노래가 병합된 아이러니한 작품이야. 그런데 노래와 영상이 너무 잘 어울려서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 영상의

 마지막에는 폐막식을 지켜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알 수 없어. 푸티지에 등장하는 곰 '미샤'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구소련체제에 대한 향수를 상징한다고 해. 곰이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하늘로 영영 날아가는 장면과 때마침 나오는 노라 존스의 애수 어린 팝을 들으면 이상한 향수를 감각하게 돼. 왠지 나도 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만 같은, '실체 없는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이 작품이 전시의 기획을 아주 잘 설명하는 것 같아서 인상 깊었어.





스티브 비숍


<당신을 기억할 무언가>는 전시실 한편에 조성된 상아색 팬트리, 생일 케이크, 라디오, 플레이 리스트로 구성된 설치다. 설치의 모든 요소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일반적인 규격을 다소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길게 늘어진 팬트리의 스케일은 작가가 관심을 가진 '무한한 시간대'와 같은 추상적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시도되었다....(중략)... 작가에게 키치(kitsch)의 인공적 특성을 넘어선, 사물에 대한 진실된 감정과 반응, 연결은 영원을 추구하는 갈망이나 속임수에 앞설 수 있는 "이중성"이다.
출처: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일민미술관





스티브 비숍의 또 다른 작품이야. 주방을 연상시키는 상부 장과 하부 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대. 영원성 안에서 무한히 늘어나는 시간처럼, 공간도 길게 늘어뜨린 모습 한가운데, 한가로운 재즈가 흘러나오고 누군가 먹다 남긴 케이크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어. 그래, 그거 같았다니까? 백 룸! 으스스하면서도 익숙한 공간의 비정상적인 확장. 그 안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괜스레 등골이 서늘하기도 했지만, 이런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 둔 게 흥미로웠어.















isvn

 <루키쨩의 미래>는 '루키쨩'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의 친구가 되어 시간 여행을 하는 TRPG다...(중략)... 표면적으로 게임이 제시하는 목표는 루키쨩을 죽음에서 구하는 것이지만 확률상 게임의 최종 결과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도록 설계되었다. 현재라는 시간을 일종의 매체로 이용하는 TRPG에서 플레이어의 진정한 유희는 루키쨩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채 새로운 타임라인의 루키쨩을 만나는 것,... 두 타임라인의 모순을 전략적으로 지연시키는 묘미에 있다.

출처: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일민미술관








isvn은 '게임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을 만드는 아트 그룹이야. 밴드 실리카겔의 보컬 김한주 씨도 isvn의 

멤버라고 해. 이들이 만드는 게임은 80-90년대생이 유년기에 경험한 게임 플레이 경험을 압축하고 있어.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도 있지만, 이렇게 고퀄리티의 보드게임도 전시의 일부로서 경험할 수 있어 아주 

참신하고 즐거웠어. 게임에 참여하고 싶다면, 3층 전시실의 스태프에게 말씀드리면 돼. 최소 2인부터 할 수 있는 게임이니 참고하길! 게임 소요 시간은 약 50분!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매력적이고, 게임이 끝나면 보드게임 했던 종이를 기념으로 가져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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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도 '포에버리즘'이라는 테마 아래서 회화, 사진, 영상, 조소, 게임 등, 정말 다양한 범주의 예술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알차고 재미있었어! 다만, '포에버리즘'이라는 개념에 대해 

사전에 충분한 이해가 없다면 작품들의 공통된 맥락이 잘 찾아지지 않기에, 이번 레터를 읽고 전시를 보러 가는 연이들은 200% 즐기고 올 수 있을 듯해!


우리를 현혹하는 것들, 반복되고 비슷한 콘텐츠들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내가 진짜로 그리워하는 

근원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 지금 와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가 나온다고 해도, 그게 내가 가진 향수를 해결해 줄 것 같진 않아. 내가 진짜 그리운 건 반짝반짝한 눈으로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봤던 꼬마 시절의 나 자신이니까.


그럼 여기까지 전시 소개와 레터를 마무리할게. 휴- 상당히 길고 어려운 레터였던 걸까...? (나 혼자 지쳐서 그런 걸지도...) 끝까지 레터 읽어준 연아, 진짜 고맙고.... 부디 이 레터가 연이를 전시장으로 발걸음 

하게 만들기를...! 전시 다녀온 연이들이 있다면 후기 부탁해! 더불어 피드백이나 의견, 전시 추천 등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답장해 줘~

그럼 안녕!



From. 다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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