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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어리 May 23. 2024

킬과 야마 사이

주영화의 두 번째 레터




잠금 해제!





좋은 아침! 나는 벌써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있어.

어제는 면역력 저하로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꾸역꾸역 일을 해야 돼서 아주 조금은 서럽더라.


여니 너는 밥벌이로 뭐 해먹고 살아? 동병상련의 전우애를 나만 느끼는 게 아니길.

아무튼 이번 주 금요일은 휴일이야. 우리 이틀만 잘 버텨보자 :)







#

여나 안녕? 오늘은 영화 말고 내 직업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해.


   나는 지금 인턴 기자로 일하고 있어. 굳이 ‘인턴’을 붙이는 이유는 화제성 기사를 작성하는 일이 주된 

업무이기 때문이야. 정식 기자들이 하듯 현장에서 취재하고 아이템을 발제해서 기사를 쓰는 일은 잘 없어. 내 이름을 내건 단독 기사를 쓰는 경우는 더욱 드물지.


   화제성 기사를 쓰다 보면 속된 말로 ‘현타’가 오기도 해. 전공의 파업이나 교권 침해 등 당시 중요한 

의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때도 있지만, 이슈가 없는 평화로운 날에는 지엽적이고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아이템을 써야 하기 때문이야. 언론사도 결국 기업이어서 조회수를 무시할 수 없어. 회사 경영 차원에서 인턴 기자는 클릭률을 높여 이윤을 가져다주고, 인턴은 자소서에 경력 한 줄 채우면서 실무 경험도 얻을 수 있으니 상부상조인 셈이지.




✁・・・




   그렇지만 가끔은, 정말 쓰고 싶지 않은 기사를 쓰는 날도 있어. 누군가를 해할 게 분명한 공격적인 제목, ‘전해졌다’ ‘알려졌다’는 단어로 사실 검증의 책임을 회피하는 문장, 포털 댓글란에 ‘기레기’라며 나를 

질책하는 댓글들.... ‘회사가 시켰으니까’ ‘기자도 그저 회사원일 뿐이니까’라며 합리화하기에는 바이라인에 박힌 내 이름 석 자가 부끄러워지더라. 그래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 인간이 호기심 가득한 동물인 이상, 옐로우 저널리즘은 뉴스가 태동한 이래로 영원히 숙청되지 않을 동전의 양면과도 같거든.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순간은 오랜만에 취재다운 취재를 하면서 단독 기사를 준비할 때야. 

나의 한계가 가장 크게 드러나는 순간이지. 한 번은 국제결혼업체의 사기 행각에 관한 제보를 듣고 취재에 나섰어. 중매 상대의 인적 정보를 증명하는 서류 없이 만남이 이뤄졌다는 건 확실히 문제라고 생각했어. 그 업체가 구청의 영업 정지 처분을 받고도 상호만 바꿔서 그대로 운영하는 것도 편법이라고 확신했어.




   직접 취재해 보니 편법은 맞더라. 하지만 법의 구멍은 기대보다 촘촘하지 못해서 모든 상황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지 못하더라고. 60대 남자가 스무 살 가까운 베트남 여자만 원했고, 업체 측이 ‘그건 도의상 못 한다’며 거절했더니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구청에도 신고하고 언론사에도 제보한 거였어. 내가 파악한 

뒷얘기는 많았지만, 모든 걸 담을 수 없어서 결국 표면에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기사를 썼지. 그렇게 발행된 단독 기사는 국제결혼업체를 비판하는 유튜버들이 인용하더라고.




✃✁・・・




   기자가 데스크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그래서 야마가 뭔데?”일 거야. 야마는 쉽게 말하면 ‘기사의 논지’이고, 직관적으로 말하면 ‘기사가 될 만한 핵심 포인트’를 뜻해. 기사는 공적 글쓰기여서 나이브한 

주제를 다루지 않아. 시의성 있고,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면서도, 새로운 것이어야 하지. 천일야화에서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매일 밤 재밌는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줘야 했던 셰에라자드처럼 말이야.




   야마가 되지 않는 자질구레한 사연은 동이 트자마자 왕이 처녀의 목을 뎅겅 잘랐던 것처럼 ‘킬(Kill)!’ 된단다. “이건 얘기가 안 돼. 킬!”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킬!” “야마가 안 서잖아. 킬!”




데스크 단골 멘트 "킬"





작고 소중한 나의 메모장



  

   킬과 야마 사이에 위치한 애매한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는지 아니? 사소한 것에서 사소한 영감을 얻고 그걸 사소하게 풀어내는 나 같은 사람의 휴대폰 메모장으로 들어가는 거지 뭐. 그러다 어떤 메모는 가끔 여니들에게 보여줄 만한 교환일기가 되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취재 당시 국제결혼업체 관계자와 내가 나눈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를 밝히면서, 

오늘 일기를 마칠게.



•·················•·················•




   "인턴으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선 기자님에게 앞으로도 정론을 해주시길 부탁드리며 한 말씀 드립니다. 언론이란 펜에 의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보자의 말을 쉽게 믿고, 

당사자에게는 전화 한 통으로 답변을 들은 뒤 그것이 진실인 양 글을 쓰는 것은 정론이 아닙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목숨을 잃습니다. 나름의 소명과 사명을 갖고 예쁜 사랑을 연결해 준다는 

직업의식을 지니고 일해온 지난날들이 허탈해지네요. 저희는 일부 업체의 불법을 지적하고 잘못을 논하면서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국제결혼중개업도 이제는 올바르게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전 직원들이 나름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직업군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변화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예전에 언론인으로 10년을 일한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깊이 없이 썼던 수많은 글이 일부 억울했을 당사자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라는 생각에 평생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한쪽 면만 보고 듣지 마시고, 더욱 자세히 살펴본 뒤 약자를 돌아보시고, 억울한 사람을 살펴주시는 

기자님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두서없는 글을 보내 죄송합니다. 수고하십시오"



   "저도 취재를 하다 보면 너무 많은 사연을 알게 돼서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언론계에 계셨다고 하니 

아시겠지만, 야마를 세우고 가독성 있게 기사를 쓰다 보면 취재한 내용을 기사에 모두 녹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번 기사를 통해 법률상 허점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제 경험이 아직 부족했나 봅니다. 해주신 말씀 

허투루 듣지 않고 잘 새겨서 성숙한 직업의식을 가진 기자가 되겠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답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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