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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에 쓰는 편지 Oct 05. 2022

감정을 미워하는 일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이 밉다는 생각이 들 때

 중학교 때부터 판타지 영화를 좋아했다. 옷장의 문을 열면 펼쳐지는 다른 세계,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풍경들, 나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에 황홀해하는 주인공들의 표정이 그렇게 행복해 보였다. 그곳이 숲이든, 바다든, 아님 은하계를 넘어 펼쳐진 다른 우주든 지금껏 살아온 환경과 다른 환경에 놓였을 때 느끼는 그 감정을 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 주인공들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그때부터 판타지, SF처럼 비현실적인 주제의 책과 영화들을 많이 접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들이 예뻤다. 비현실적인 망상에 빠져있다 나오면 현실의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언제나 나는 괜찮아야만 했던 아이였다.


첫째니까. 너는 어른스러운 아이니 이해할 테니까. 그래야만 했으니까.



 판타지 서사의 마법처럼 들려와 박혀버린 말들이 나를 괴롭히는 줄도 몰랐다. 주인공들에게 걸렸던 마법들처럼 나도 뭔가에 홀려있었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슬프고 우울한 감정들을 담아서 숨길 틈도 없었다. 그런 감정들은 있는지도 몰랐을 만큼 저 구석 어딘가에 방치되었다. 고등학교 때 나와 비슷한 아픔이나 더한 아픔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서야 깨달았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어린 날의 내가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괜히 나 자신이 싫어졌다. 이미 지난 일을 꺼내와서 다시 아파하는 게 누굴 위한 일일까. 나를 위한 일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사람은 아프거나 슬플 때, 타인으로 인해 좋지 않은 감정을 얻었을 때 누군가를 탓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마 그것은 전부 자기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 끝없이 자신만을 탓하면 결국 자기 자신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한 가지 드는 의문. 그럼 누굴 탓해야 하는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탓해야 할까? 그 사람도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름 노력하려고 발버둥을 칠 텐데. 그런 사람 앞에 서서 그를 힐난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자격이 있을까.

 이런 식의 생각들이 끝없이 반복되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판타지 장르의 책을 찾았다. 고등학교 3학년쯤이 되어서야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네가 판타지 장르만을 고집하는 건 어쩌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너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라고. 그때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그런 감정들로 힘들어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고가 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판타지가 마냥 재미있었고, 취미인 글에 써먹기 좋은 재료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으니 읽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파해도 된다는 걸, 그런 일들이 충격적이었다고 티 내기엔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 감정을 잘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부분에서 아파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들여다본 내 감정은 생각보다 예민했다. 거기까지 사고가 닿으니 예민한 나 자신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내가 아픈데, 이걸 왜 숨기고 다 이해해야 해. 나는 왜 항상 괜찮아야만 해. 그렇게 아파하는 자신을 알고 나는 나름 내가 아프단 사실을 표현하기로 했다. 짜증이 많아지고, 뒤끝이 심했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티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종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 싫어졌다.


 친한 친구에게 느끼는 자격지심, 그로 인한 질투심. 화나면 화나는 대로 내보냈던 말들과 굳은 표정. 입시 스트레스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남발했던 짜증과 걸러지지 않은 감정들···. 문득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나만 유난스럽게 고3 시절을 보냈다고 느꼈다. 내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사과하지 않았고, 내 잘못이 아님을 자기 합리화하는 자신이 싫었다. 싫었음에도 그런 감정을 아무 생각 없이 표출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반성도 하지 않았다.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상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나만' 유난스럽고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그렇게들 얘기를 했었으니까.

 대학교에 입학할 때쯤 되니, 그런 행동들이 후회되기 시작하면서 나의 잘못들을 하나씩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잘못을 고쳐나간 것은 좋았다. 사과를 해야 할 일에 사과를 하고, 상대의 실수를 눈감아주며 이해했다. 사실 사과를 한다는 일 자체가 자존심이 강한 나에게 많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존심이 강한 내 성격 탓이라며 항상 나 자신을 자책했다. 그런 습관이 지속되다 보니 모든 일을 저지른 후에 전부 못된 내 성격 탓이라고, 나는 생각보다 쓸모없고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고방식은 아직도 여전하다.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지금까지 변해왔듯, 이번엔 그런 차례인가 보다 하고 생각한다. 가끔은 나의 이성이 안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니고, 내가 사과해야 할 일도 아니며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며 다시 채찍질한다.


 밤마다 비참해지고, 우울해진다. 낮이 되면 우울감을 털고 생활한다. 다시 밤이 되면 하루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나 자신을 비난하고, 몰아세운다.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 자기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다루지 못하는 사람. 의지할 곳을 찾으며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능력 없는 그런 나.


그리 여기다 보니 슬슬 나 자신을 몰아세우는 내가 안쓰러웠다. 자꾸만 나를 채찍질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미워하고, 반인륜적이라고 욕하는 내가 싫다기보단 안아주고 싶었다. 너무 감정을 표출하고, 생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말도 안 되는 잣대를 들이대며 재단하려 한다는 것도 좋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돌봐야 할지 모르겠다. 직접 어루만지기에는 너무 아프고, 자세히 들여다보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다. 모든 사람들 역시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겠지.



 열다섯의 내가 그랬고, 열여덟의 내가 그랬고, 스무 살의 내가 지금은 이렇다. 아무것도 몰랐던, 이기적이었던, 무기력하고 엄격한 나. 앞으로도 스물다섯의 나는 스물다섯의 나를 살아가겠지. 하지만 적어도, 스무 살의 나처럼 자기 자신을 그렇게 몰아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행동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지금 조금씩 깨닫고 있으니까. 나 자신에게는 조금만 더 관대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니 그때의 너는 조금 더 온기가 있는 사람이 되렴.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도 좋으니 너 자신을 더 살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렴.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것을 비난할 줄 아는 사람이니, 반대로 따뜻한 온기를 네 스스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하루하루 후회가 없는 날을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그게 전부 다 네 탓이라며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를. 스무 살의 내가, 스물다섯의 너에게 미룬다.


 부디 스스로 아파하지 않기를. 네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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