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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에 쓰는 편지 Oct 05. 2022

드라이플라워

아프게 지나간 너를 추억할, 마지막 기억


저릴 듯 아플 때가 있다. 지나간 네 흔적으로. 네가 물들인 기억들로.


 그때의 나는 그때의 널 그리워했겠지. 누가 뭐래도 나의 첫사랑은 그 사람이었다, 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내게 너뿐이기에.  너와의 연애엔 나의 아픔이 없었다. 아니, 없는 척하고 싶었다. 혹여 내가 가진 불안정한 이 감정이 네게 옮아 망쳐질 우리가 무서웠다. 괜찮다고 했다. 알아주길 바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인 걸 알면서. 내 속을 알아채며 미안했다고, 그런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토닥여주길 바랐다. 너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나를 다시 끌어올려주길 바랬다. 사랑했다. 넘쳐흘러 어쩔 줄 모르도록 사랑했다. 처음이었다. 감정에 휘둘려 미친 듯이 끌려다니는 게. 한 사람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나락과 꽃밭을 오갔다. 너 하나 때문에 미친 듯 매달리던 공부도 놔봤다. 후회는 없었다.     

 모든 것이 느린 나를 네가 기다리기엔 역부족이었겠지. 너와 나는 누가 보기에도 정반대였다. 작은 돌에도 어쩔 줄 몰라 길을 멈추는 사람이 나였다면, 발에 차이는 그 작은 돌을 느끼지도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사람은 너였다. 넌 그냥 그렇게 걸었다. 너는 마음에 상처가 많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짊어지기에 여린 사람이었다. 상처받기 싫어 가시 갑옷을 스스로 입는 사람이었다. 눈에 훤히 보이는 핑계들이 아팠다. 아닌 걸 알면서 괜찮다고 했다. 대신 작게나마 표시를 해두었다. 조금만 이 표시를 눈 여겨보면 금방 내 마음에 다다를 수 있도록. 예상보다 네 마음에 상처가 많았던 것 같다. 선행 길을 잘 다져 놨다고 생각했다. 그 길의 끝에 서서 날 가만히 안고 토닥여줄 너를 기다렸다. 네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너를 기다렸다. 그림도 그렸다. 그렇게 닳도록 얘기했던 예쁜 반려견들과 조용한 집. 다락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 작은 창문도 있었으면 좋겠어. 하고 그렸던 너와 함께할 내 미래.


 아무리 예쁘게 그림을 그려도 넌 오지 않더라. 그래서 길을 되돌아 네게 갔다. 짧다고 생각했던 길이 꽤나 고됐다. 차는 숨을 애써 누르며 네게 미안함을 전하려 했다.  

   

생각보다 힘드네, 내가 먼저 마중 나왔으면 더 편했을 텐데. 내가 더 크게 표시해 놓을 걸. 눈에 잘 띄게, 그렇지. 미안해. 있잖아, 생각해봤는데. 그 표시들. 소용없는 것 같아. 앞으론 내가 말할게. 네가 힘들게 찾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도록 내가 먼저 말할게. 사랑할게. 그러니 내 손 잡아. 같이 걸어줘.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다. 네가 날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괜찮았다. 기념일에 준비한 내 선물을 받고 시큰둥해도, 내 생일을 잊고 챙겨주지 않아도. 조금은 속상했어도 어쨌든 너만 있으면 됐다. 내 약은 눈물이라, 잠시 울고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울고 있는 나 자신이 미웠다. 이 정도 하나 이해 못 해서, 이거 하나 못 버텨서 결국 눈물을 쏟고야 마는 나 자신이 더 싫었다. 그러나 한 번 길을 잃은 시선은 다시 돌아오질 않더라. 너는 그대로 내 손을 놓았다. 내가 좋다고 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제가 그리는 미래엔 내가 없다고, 그는 나와 손을 잡으면 끝을 그린다고 했다. 나와 마음은 같은데 네 반대편 손 끝은 나와 다른 미래를 그렸다.     


 아. 이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구나.     

 내가 아무리 큰 표시를 남겨도, 이리 오라고 널 붙잡고 이끌어도 넌 오지 않는구나. 너의 미래엔 내가 없구나. 내가, 나는. 그저 너의 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놓아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네 행복을 빌 정도로 반듯한 사람은 아니었다. 가라고 소리쳤다. 제발 떠나라고. 너는 이번만은 내 뜻대로 해주었다. 넌 도망치듯 달아났고, 난 덩그러니 남았다. 울었다. 그렇게 울고도 또 나올 눈물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진 내가 우스웠다. 그렇지만 혼자는 싫어, 아무도 없는 게 미칠 듯이 싫었다.

 선명했던 사진이 급속도로 빛을 잃으며 바랬다. 그럼에도, 사진이 바랬음에도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에 휘둘리기 싫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방황했다. 너 대신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안심했다. 따뜻했다. 잠시나마 네 온기를 잊었다. 다른 사람의 따스함을 새기려 안간힘을 썼다. 끊임없이 너와 그 사람들을 비교하며, 그렇게 억지로 너를 잊으려 노력했다. 10개월이 지났다. 작은 사람도 힘을 냈다고, 나같이 작은 것도 힘을 냈다고 서서히 네가 옅어졌다.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말린 드라이플라워처럼 가끔 네 생각이 날 때 꺼내보려고 했다. 닿을 수는 없겠지. 닿자마자 부스러질 걸 알기에, 그렇게 걸어두고 우리를 꺼내보고 싶었다. 첫사랑이었으니까. 나에게 너는.

    

 지난 계절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때의 바람, 그때의 풍경. 그리고 그때의 감각들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을까. 어쩌다 다시 나에게 내려앉은 너는, 뒤늦게 계절을 돌리고 싶어 했다. 나 역시 흔들렸다. 네 손길에 못 이기듯 따라가 그 계절에 살고 싶었다. 벚꽃도, 깊은 밤하늘도, 떨어지는 낙엽도, 반짝이는 눈송이도 전부 너의 계절에 있었다.

    

 될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어.     


 10개월, 약 300일을 조금 넘기는 그 시간. 나는 시간 속에서 헤매며 자랐다. 아픔을 숨기고 참는 법을 배웠다. 절제하는 법을 배웠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무뎌졌다. 너에게서 무뎌졌다. 어느 정도 굳었다. 영원히 무를 줄만 알았던 감정이 굳었다. 모른 척 돌아가기엔 굳은 내 마음이 걸렸다. 애쓰게 굳느라 여기저기 금이 간 모양이 아팠다. 지난 시간 동안 애쓴 마음을 네가 다시 깨뜨리지 않길 바랐다.     

 그래, 나는 네가 아팠다. 너는 내게 슬픔이자 아픔이었고 성숙의 증표였다. 너로 인해 자라고, 굳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너와 내가 남긴 사진들로. 나조차 놀랄 정도로 단호하게 네게서 돌아섰다. 너는 아파했다. 언뜻 곁눈질로 보인 네가 무너져 내렸다. 아팠다. 하지만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지 못해. 그 계절로는.

    

 너는 새로워진 우리가 만들어낼 또 다른 행성들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새로워진 만큼 더 나은 곳을 만들 수 있을 거야. 나는 네가 만들어낼 그 새로움도 좋아. 이어지는 게 아니야, 다시 시작하는 거야.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 네가 돌아서도 나는 여기 있어.

     

 꽤나 자신 있게 말하는 네가 믿음직스러웠다. 나 그뿐이었다.

     

언젠가 그 행성은 다시 부서지겠지. 알고 있잖아. 우리가 바라는 건 새로운 미래가 아니야. 이미 스쳐 지나왔던 그것들이야.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똑같을 수 없어. 그건 이미 멸망한 거야. 적어도 내 속에서 그건 그냥 빛바랜 사진일 뿐이야. 마치 고대의 기록처럼. 그랬구나, 하는 그것.

    

 돌아서는 나에게, 그제야 너는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그때 못했던 말 지금 하겠다고. 앞으로 다가올 너의 생일, 축하한다고.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올해는 미리라도 말할게, 축하해.'


 네 미안함은 그저 네 죄를 덮기 위한 눈가리개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덤덤한 척했으나 나에게 꽤나 그것들은 아팠고, 날카로웠다. 때 늦은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난 건 되돌릴 수 없어. 알잖아, 이미 내 미래엔 네가 없어.


 너는 내 기억 속 드라이플라워, 그뿐이어야 했다. 가끔 꺼내볼게. 문득 생각나면 그리워할 수도 있겠지. 그것이 이별에 대한 예의니까. 하지만 정말 그뿐이야. 더 이상 내 세상을 너로 채울 수는 없어. 나는 이미 다른 세계를 만났고, 그 세계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중이야.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행복해. 이제 이 세계가 내 전부가 될 거야. 더 깊게, 그리고 더 천천히. 잔잔하게.

     



 만약 이 세계가 끝나더라도 너는 드라이플라워, 딱 그뿐이야. 내 책 속에 널 소중히 끼워 추억으로 간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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