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몸 새벽글

(간혹) ‘부르짖는 시간’

새벽 글 / 2022-2

by 지영훈

(간혹) ‘부르짖는 시간’ 2022년 11월 10일


누구에게 무엇을 부르짖는 행위를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가끔 하늘을 너머 그 너머로 보던 시간이 생각난다.


베트남에 오자 얼마 되지 않아 가슴이 곤고하고 심장이 아파서 밤 두 시에 일어나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잠들면 아침에 다시 일상을 시작하던 그 시간이 있었다. 이유는 추측할 뿐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 무렵 그런 저런 이유들이 있었다. 자녀들이 그 가슴속 마음으로 아파할 때 난 어찌하지 못하는 방황하는 마음으로 하늘에 부르짖었다. 남편과 다투었던 날의 그 사는 모습도 결국 부르짖음이었고, 일하던 일터를 떠나며 사표에 몇 줄에 쓰여졌던 문장도 삶의 깊은 부르짖음이었다. 홀로 기차나 버스에 올라타고 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랬던 일도, 새벽에 중언부언 기도를 거듭했던 그 반복된 언어들이 부르짖음이었다.


아침이면 새벽 노트에 써 내려갔던 기도들! 기도문에 적힌 글들이 나의 영혼의

부르짖음인 줄 알았지만 삶에서 나오는 토로와 나 자신의 돌봄과 위로와 피의 흐름을 통하게 하는 트임의 행위였고 부르짖음이었다.


이제 이 아침에 생각한다. 내 삶의 60년을 돌아보며 가장 옳았던 호소, ‘부르짖음’은 누구에게 했던 것일까? 사람에게 했던 것은 싸움을 불렀고 나 자신의 혈관을 막는 분노를 성장시켰다. 시간을 훼방하고 결정을 옳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었다. 바른 대상을 찾는 지혜가 없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제한된다. 내가 가지지 못하는 장점이 대상에게 있어도 내가 가진 장점은 대상에게 없고 서로 다른 환경과 여건의 다른 시점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하나님을 찾을까?


왜 신을 찾을까? 사람은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고 순수한 가슴의 더 큰 넓이로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신을 찾을 것이다. 좀 더 큰 대상을 찾는 사람의 지혜가 있다. 부르짖는 대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부르짖음은 분노로 받아져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역효과를 원하지 않는 지혜가 있는 부르짖음이다.


그 신을 난 하나님으로 마음에 정하였고 그렇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품에 부르짖는 경험을 자주 가졌다. 나의 산 동안의 일생에서 가장 지혜로운 행위이다. 신성에 참여하는 행위와 시간이었고 시간을 올바르게 찾아 응답은 일일이 다 수확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크고 아름답고 위대한 섭리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엇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