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글
'나의 기도' 2022년 11월 17일
시간들이 걸어온다. 하늘이 가슴에 들어온다. 공간을 상상하면 날개가 어깨에서 삐쭉삐쭉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날기 위해서이다. 어느새 하늘에 있다.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집, 골목들, 산과 강과 들이 펼쳐진다. 눈을 감아도 날 수 있고 눈을 떠도 날 수 있다. 행복하고 찬란한 영과 몸의 느낌이다. 눈을 뜬다.
방 한 곁에 조용히 앉아 있다. 무릎을 꿇고 있다. 두 손을 끓은 무릎 위에 정갈이 모아 놓고 머리는 몸과 함께 말아서 거의 무릎에 닿을 참이다.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하여? 물론 자녀들이며 나 자신이고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며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바라는 바들이 점자 글자들처럼 따박따박 박히듯이 기도문으로 쓰여서 공간에 펼쳐진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았다?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요?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말을 내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서 마음이 멈추었다. 납득할 수 있을까? 난 나를 위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는 데 무슨 말일까?
눈을 감으면 펼쳐지던 날개가, 허공을 비상하며 멀리 내다보며 날던 소망의 시간이 사라진다. 그런 기도를 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아니하려고 해도 기도 내용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기도할까? 강한 권위로부터 명령이라 생각하고 순종하듯이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냥 기도해볼까? 나를 미워하였다기보다는 내게 고의적으로 크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 만난 어처구니없던 기만들, 거짓말을 하고 떠났던 이들을, 함부로 말하고 폭력적인 언어를 섰던 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할 수 있을까? 마음 깊이는 아니더라도 마음에서 올라오는 언어가 없이 하는 축복과 기도가 진정일 수 있을까? 진정이 아니라면 왜 하여야 할까?
숨을 고른다. 생각을 하다 보니까 하기 싫거나 마음에서 거부되는 일들에 대하여 나 자신을 강하게 부인하고 거슬려서까지 '힘을 다하여'하는 것이 기도일지도 모른다. 진정일까? 그럴 수 있을까? 여하튼 난 어제도 그제도 오늘 아침도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을 위하고 남편과 부모님을 위하고 형제들을 생각하고 함께 일하는 일터의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였다. 더 할 기도들이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대상들을 향한 나의 원이 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공간에서 나를 꺼내어 내가 경험하고 바라고 기원하는 것을 내려놓아 볼까? 기도의 대상들이 멀어진다. 멀리 하고 싶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자들을 위하여 잠시 아니 그 반의 반이라도 할애하여 시험적으로 억지로 말해볼까? 내게 해를 준 사람들을 위하여 오분만 할애해서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하다. 기도도 공부처럼 지경을 넓혀야 한다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하여 여행을 하듯이 한 번 해 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준비하듯이 이 여행의 보따리를 꾸리고 있다.
생각의 경계의 담을 무너 드리고 눈을 감고 기계적으로라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좋은 말을 내어 기도해 보기로 한다. 오분 간만! 아니 더 짧게 3 분간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나를 위해 기도하는 끝자락에 이 기도를 하자. 차라리 매를 먼저 맞듯이 먼저 하자. 가장 먼저 나의 기도의 시간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을 할애해서 경계를 넓히기 시작하는 여행을 하자. 마음의 트러블이 일고 배 속이 부글거리며 요동하듯 할지라도 눈을 감으면 훨훨 날아오르던 좋은 기분과 상상의 시간을 포기하는 시간을 가지자.
시간이 걸어오는 것을 멈추는 시간! 하늘이 가슴에 들어오는 것을 멈추는 시간 3분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나의 기도 속에서만 말이다. 그런 후에 맘껏 나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