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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Oct 18. 2023

기대의 결말이
대개 실망스러울 것을 알지만,

도영과 지은의 밤새운 대화 8

밤새운 대화


할머니 댁 안방에는 보일러를 너무 세게 틀어 동그랗게 타버린 자국이 남아있는 노란색 장판이 깔려있었다. 어렸을 적 우리는 그 뜨거운 장판 위에 언제 빨았는지 모를 이불을 여러 겹 깔고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다. 힘들었던 가정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즐거웠다.


그 시절의 우리처럼, 양도영과 양지은은 다시 밤샘 수다를 떨어보려고 한다. 우리의 깊숙한 마음들을 때로는 실없는 이야기들을 당신이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괜찮다면 같이 떠들어주기를.


매 챕터가 끝날 때마다 밤새운 대화가 연재됩니다.






지은


가끔 엄마를 원망하지만, 엄마가 내 인생에 바친 헌신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크기야. 아마 그 안에는 애정과 책임감이 오롯이 녹아있겠지. 그렇지만 그토록 나를 사랑하면서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엄마의 양면적인 모습이 의아하기도 해. 결국 엄마와 딸 사이도 다른 인간관계와 같이, 아니 혹은 더 쉽게 어긋날 수도 있는 것 같아. 



도영


나도 그렇게 느껴. 엄마와 이야기할 때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거든. 같은 말일지라도 엄마에게서 나온다면 다르게 들려. 엄마의 말은 쌓였던 시간과 감정들을 데리고 다가와.



지은


언젠가 엄마에게 진심 어린 이해의 말을 듣고 싶어. 언니도 같은 생각을 한 적 있어?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할머니에게 유년기의 속상함을 털어놓던 이모들의 모습이 생각나. 말없이 티비를 보던 할머니의 모습도.



도영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한 적 있고 간절히 바랐었지만 지금은 기대하지 않고 있어. 이뤄지지 않을 것 같거든. 그리고 점점 세월의 흔적이 여실한 엄마의 얼굴을 보며 결국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그냥 엄마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잦아지는 것 같아. 하지만 네 말대로, 마흔이 넘는다고 쉰이 가까이 된다고 이 속상함이 아예 없던 일이 될 것 같진 않아. 이젠 그냥 나라는 사람의 한 조각처럼 느껴지거든. 벌써 서른이기도 하고 말야. 


지은아, 넌 이제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싶어? 아니면 그래도 훗날에는 기대하고 의지하고 싶어?



지은


‘기대고 싶지만, 그 결말이 대개 실망스러울 것을 알았다’가 내 대답이야. 어렸을 적에는 삶이 요동칠 때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털어놓고 싶었어. 특히 어른에게 무언가를 털어놓는다면 해결책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 기대는 번번이 무너졌어. 이제는 알아. 어른이 되더라도 타인의 무게를 덜어주기는 힘들다는 것을. 사람들은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기도 벅차다는 걸 말이야. 동화 같은 아름다운 결말은 내 인생과 거리가 멀었어. 누군가에게 기대하다 슬픔에 곱절의 이자가 붙는 일을 이제는 피하고 싶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 많아진다는 말도 있잖아. 기대 역시 그런 걸까? 때로 맑은 눈으로 세상을 대했던 내가 그립기도 해. 하지만 기대가 실망을 낳는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나도 언니와 같이 기대하지 않아. 점점 건조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아.



도영


사실 이건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던 기대와 실망의 원리가 아닐까? 우리는 엄마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실망하니까. 그건 기대한다는 뜻이잖아. 


나는 계속해서 실망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것 같거든.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대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언젠가 실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에 대한 불안은 영원히 접히지 않을 것 같아. 네 말대로 이 정도는 괜찮은 걸까?



지은


그럼에도 타인을 믿을 수 있는 것. 전 세대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이상적인 승화가 아닐까? 글쎄. 나는 내 방식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상처받을 용기가 없어서 회피하는 거라고 자신을 판단하거든. 살아가며 타인에게 기대하고 상처받는 건 필연일지 몰라. 하지만 그들이 가진 대처 방법에 따라 그 결말이 달라질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나는 내 주변인들이 더 아름다운 엔딩을 맞이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된다면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기대고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도영


타인의 슬픔에 같이 슬퍼할 수 없는 슬픔이 공감갔어. 어떻게 해야 우리는 타인을 위로할 수 있을까? 



지은


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오히려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됐나 봐. 슬픔의 무게를 알면 알수록 어떤 위안이 그들에게 와닿을지 되려 조심스러워진 것 같아. 그렇지만 말이야. 내 슬픔을 통해 한가지 깨달은 점이 있어. 소중한 이가 위태로울 때 그저 곁에 자리하는 것이 어떠한 말보다 위로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야. 내가 힘듦에 중심을 잃고 휘청일 때도, 슬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도 내 옆에 어떤 이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용기가 생겼어. 이것 하나는 깨달았으니 조금은 얻은 것이 있는 걸까? 위안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와닿았으면 좋겠어.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도영과 지은의 밤새운 대화 7: 아빠를 기억하는 방법 읽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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