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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Oct 08. 2023

우리의 엄마들의 엄마

도영과 지은의 밤새운 대화 5

밤새운 대화


할머니 댁 안방에는 보일러를 너무 세게 틀어 동그랗게 타버린 자국이 남아있는 노란색 장판이 깔려있었다. 어렸을 적 우리는 그 뜨거운 장판 위에 언제 빨았는지 모를 이불을 여러 겹 깔고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다. 힘들었던 가정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즐거웠다.


그 시절의 우리처럼, 양도영과 양지은은 다시 밤샘 수다를 떨어보려고 한다. 우리의 깊숙한 마음들을 때로는 실없는 이야기들을 당신이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괜찮다면 같이 떠들어주기를.


매 챕터가 끝날 때마다 밤새운 대화가 연재됩니다.






도영


한때는 엄마였던 할머니. 지금 지은이에게 할머니는 어떤 존재야? 나는 네가 할머니를 둘도 없이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원망하는 것 같다고도 느꼈었어.



지은


맞아. 할머니가 삼촌의 잘못을 ‘조카를 귀여워하는 것’으로 치부한 그날부터, 할머니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어. 여느 가족보다 아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를 생각하며 이해하다가도 그 끝에는 씁쓸함이 맴돌아. 편지에서처럼 할머니는 중학생 시절 내 엄마였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 그래서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애틋함과 미안함이 남아있는 것 같아. 몇 해 전 요양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찾아뵀던 날이 생각나. 할머니는 어렸을 적 나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어. 할머니의 미안함에 ‘그날’도 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 할머니를 때로 원망하기도 했지만 애틋하게 추억하고 싶어.



도영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슬프다. 원망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게 되는 순간을 나도 알아. 사람들은 원망보다는 용서를 선택하라고 말하지만, 원망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 당연한데도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필연이 야속해. 가족은 서로를 선택하지 않으니까, 서로를 쉽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성격의 사람들이 가족으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도.



지은


맞아. 또한 그 시절 기억은 우리가 의도치 못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이 없었다면 할머니와 나는 서로를 더 때 묻지 않은 그림으로 간직할 수 있었겠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머니를 마냥 원망할 수 없어. 아마 할머니도 그럴 거로 생각해.



도영


그 시절 할머니와 있었던 소중하고 행복했던 추억이 있어? 만약 있다면 듣고 싶어. 



지은


편지에도 적었지만, 늦은 밤길을 마중 나온 할머니가 오랜 시간 기억에 남아있어. 중학교 시절, 방과 후 미술 수업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 집으로 가는 버스는 자주 오지 않았기에 나는 더 늦게 집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지. 가로등도 거의 없는 시골길. 버스에서 내리면 그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갈 생각에 무서웠어.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내가 부탁한 적도 없는데 그 길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 버스에서 내리자 나를 맞아주는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어. 늦은 시간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오며 무서워할 손녀를 기다린 할머니. 그때부터 나는 깜깜한 길이 무섭지 않더라. 왠지 할머니와 같이 걸었던 그날 밤이 생각나거든.



도영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그 길은 참 무섭지. 깜깜하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구불구불한 시골길. 그런데 난 그 길을 20살 넘어 혼자서 할머니 댁으로 갔던 날 처음으로 무섭다고 느꼈었어. 그전까지는 너와 영은이, 우리 셋이 농담하며 산책하느라 무서워할 틈이 없었거든. 그래서 그 길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던 그 밤, 이 길이 원래 무서운 길이구나 놀랐던 기억이 나. 너도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던 그 시간이 없었다면 언젠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까? 할머니가 그 길을 무섭지 않게 만들어줘서 다행이야.



지은


나 역시 언니들과 그 밤길을 걸었을 때는 무서움을 느낄 새도 없었던 것 같아. 우리는 그 길을 무대 삼아 춤을 추기도 했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기억이야. 중학생이 되어서야 언니와 같은 생각이 들었어. 사실 그 길이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곳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거든. 생각해 보면 그 길은 밤에 정말 적막하지. 조용한 가운데 가끔 개 농장에서 들리는 강아지 울음소리는 나를 더 무섭게 하더라. 그 길은 할머니와 언니들과의 추억으로 밝아졌어. 사람의 온기가 두려운 감정을 얼마나 상쇄할 수 있는지, 새삼 신기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할머니 집은 우리 가족들에게 의미가 남다른 곳인 것 같아. 그런데 나는 그 집에서의 엄마가 어떤 유년기를 보냈는지 잘 알지 못해. 혹시 언니는 이모에게 그런 일화에 대해 들은 것이 있어?



도영


생각해 보니 나도 엄마의 유년기에 대해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네. 하지만 들었던 몇몇 이야기들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어렸을 때의 엄마와 이모는 우리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 둘은 나이 차가 꽤 나잖아? 엄마는 큰 이모가 엄마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했었어. 다른 동생들은 너무 어려서 엄마처럼 돌봐줘야 했다고 했지.



지은


엄마도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아. 어린 시절에는 언니들이 더 크게 느껴졌다고 말이야. 지금은 다들 친구처럼 지내는데도.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변화할 동안 할머니 집은 언제나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겠지. 이모들과 엄마는 우리보다 더 그 집에 각별한 추억이 있을 거야.


우리가 다시 한번 할머니 집 안방에 모여 이불을 덮고 서로의 시시콜콜한 일화를 얘기할 날이 올까? 지금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빈집이 되었지만, 그때와 같은 소담스러운 행복을 느낄 날이 올 거라 믿고 싶어.



도영


나도 그래. 그런 날이 절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전화 한 통에 모든 게 없었던 일처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지은의 편지 8: 결국 우리는 언젠가 읽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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