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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도영 양지은 Jun 04. 2023

우리는 왜 엄마를 원망하기 힘들었을까

도영의 편지 2

그리운 지은에게



파리에는 밤새 비가 내렸어.


나는 오랜만에 엄마가 나오는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깼지.


꿈에서 나는 한지 위에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지들 위에 투명하게 놓여있었지. 한참 그림을 그리던 나는 무슨 일인지 먼 곳으로 떠났어. 내가 떠난 후 나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엄마를 찾아가 내 그림들을 건넸지. “아마 당신에게 필요할 거예요.” 그림을 받은 엄마는 좋아했어. 너무 잘 그렸다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맨 위에 놓여있던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을 알아차리지 못했어. 나는 닿지 않는 목소리로 외쳤지. "엄마, 저게 엄마 얼굴이야. 왜 엄마를 그린 그림은 안 봐?" 내 공허한 목소리 위로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었어. 얇은 한지 위에 그려진 그림들은 바람이 불자 허무하리만치 쉽게 도로 위로 날아갔지. 하지만 엄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한 번씩 봤으니 됐지." 미련 없이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는 엄마를 향해 나는 있는 힘껏 소리 질렀어. "엄마, 내 그림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버려? 저길 봐, 엄마를 그린 그림도 날아가려 하잖아!" 그렇게 닿지 않는 소리를 지르며, 나는 잠에서 깼어.


우리는 왜 엄마를 원망하기 힘들었을까


너의 편지를 받은 후부터 나의 시간은 그 질문으로 채워져 있었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며 다시 '엄마를 원망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우리는 왜 엄마를 원망하고 싶었을까'라는 새로운 질문을 찾아내기도 했어.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매일 달라졌지만 오늘 잠에서 깬 그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도 이 모든 질문의 답의 끝에는 사랑이 놓여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내 그림을 두고 돌아서는 엄마가 미우면서도, 참 보고 싶었거든.


고등학교 때까지 엄마는 내게 종종 이렇게 말했었어. “도영이가 최고야.” 아빠와 싸운 후 착잡한 표정의 엄마의 말을 한참 들어줬거나, 엄마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온갖 집안일을 했던 날들에만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 문턱을 넘으며 ‘술 그만 드시고 내일은 일하시라는' 이모의 말을 이모부에게 전하던 너처럼, 나도 완벽히 임무를 완수하는 착한 딸이고 싶었어.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었지. 내가 집안일을 열심히 했을 때, 내가 엄마의 힘든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위로해 줬을 때 엄마는 잠시나마 웃었거든. 그러던 어느 날이었나. 엄마가 이렇게 말했지. “다른 애들은 다 필요 없어. 엄마는 너밖에 없어.” 분명 칭찬이던 그 말이 왜인지 이렇게 착하게 굴지 않으면 너도 필요 없어진다는 말로 들렸지. 언젠가 너는 필요 없다는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워 꾹꾹 참았어. 엄마가 내 학교 생활을 물어보지 않아도, 엄마가 내 친구들의 이름을 단 하나도 몰라도, 나를 붙잡고 아빠 욕을 계속해도 말이야.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거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어둑했던 밤, 나는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 “나도 너무 힘들다고!” 슬프게도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말이 예상대로 돌아왔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배신감 가득한 얼굴과 함께. 그때부터 엄마를 대하는 게 힘들어졌던 것 같아. 엄마와 함께 있을 때는 숨이 막혔어. 휴대폰에 엄마의 이름이 뜨면 가슴이 두근거렸지. 착하지 않은 자식은 엄마에게 필요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엄마 앞에서 솔직해지기를 포기했기에, 착한 딸 노릇이 도저히 불가능한 날에는 그냥 엄마를 피해버렸어.



그래서였을 거야. 언젠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던 누군가가 내게 툭 던지듯 내려주었던 '애정 결핍'이라는 진단명에 되려 고개를 끄덕이게 됐던 것은. 엄마에게 착한 딸 노릇을 하던 시간부터 엄마를 피해버리던 때까지, 오랜 시간을 나는 단지 충분히 사랑받기만을 바랐어. 엄마의 행동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표 같아 화가 났지만, 쌓아둔 원망을 말하는 순간 엄마가 나를 그만 사랑하게 될까 봐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었지.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이 긍정이 아닐까 긴 세월을 의심했었어. '엄마를 원망해도 되나요'라는 내 질문의 걸림돌은 아빠라는 명백한 가해자의 존재였고, 나를 상처 주었던 엄마의 모든 행동을 나는 힘드니까 그랬을 거라는 말로 오랜 시간 변호해 왔지. 하지만 점점 격해지는 엄마의 행동에 지쳐 결국 나는 변호를 그만두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잠재적 결론을 내렸었어.


혹시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 말을 엄마도 했었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너무 어려워. 엄마는 당연히 너를 사랑하지. 엄마가 너를 안 사랑한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니!" 미안하다는 말 대신 돌아오는 엄마의 이 말들이 참 웃기다고 생각했었어. 그저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하는 자기변명들 같았지. 그런데 아빠와 이혼하고 몇 년이 지났던 무렵부터, 놀랍게도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았어. 엄마는 우는 대신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죽겠다는 말 대신 농담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지. 엄마가 이렇게 소녀 같은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 감격스럽게도 때로 엄마는 밥은 먹었는지, 친구랑은 뭘 했는지 물어보기도 했어. 십 년을 가까이 지나 변명도 내 탓도 없는 미안하다는 담백한 사과도 들었지. 그때부터 당연히 나를 사랑한다는 엄마의 그 말이 점점 믿기기 시작했어.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라. 우리는 왜 이토록 운이 없었던 걸까. 엄마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서 자식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을까. 왜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과 엄마가 내게 줄 수 있었던 사랑의 형태가 너무 달랐던 걸까.


그로부터 또다시 길고 치열했던 대화의 시간을 거쳐, 지금의 나는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라는 질문의 답이 분명한 부정임을 알아. 나는 오직 더 사랑받고 싶었고 엄마는 그저 제대로 된 사랑의 방법을 몰랐을 뿐이라는 걸 말이야. 어쩌면 내가 엄마를 원망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했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그 시절 우리에게 조금만 더 행운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나는 가끔 엄마가 될 수 있었던 이상적인 엄마와 내가 될 수 있었던 이상적인 나를 생각해. 구김 하나 없이 행복한 우리를, 상상해. 그러다 보면 상처는 없어지지 않지만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아. 아직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전 조금의 용기를 내야 하지만 더 이상 엄마와의 전화가 두렵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야.


엄마가 보고 싶다.


편지를 마치고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어.



비 오는 날 아침, 도영이가.





외사촌 관계인 양도영과 양지은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엄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양도영 양지은의 브런치와 <우리의 엄마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매거진을 구독하시고 저희가 나누는 글들을 읽어주세요. 저희가 쓰는 엄마에 관한 교환편지는 매주 한 편씩 올라옵니다. 



지은의 편지 1: 엄마를 그만 미워하고 싶어. 읽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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