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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r 15. 2021

봄에 피는 동백이 어쩐지 내게는 낯선 사람이라서

2021. 3. 15


동백나무 이파리가 하늘로 솟구치던 기이한 

음력으로 어머니의 생신과 엇비슷한 날이었다


나를 아프게 하지 말아요 하는 목소리가 들리기에

잡아당기듯 가까워지다 도착한 곳은

어느 낡은 담벼락의 식탁 앞이었다


식사 시간

반찬을 내오기에 나는 한 숟갈 맛있게 먹고

답례랍시고 그 거친 가지를 검지로 문질렀다


나를 아프게 하지 말아요

약속한 적도 없는 약속이 나를 꽁꽁 묶고

죄책감이 짙어진 공기로 듬뿍 호흡을 하자


허파에서 늑골로 늑골에서

신장으로 신장에서 심장으로 삽시간에

식물 하나가 줄기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연녹의 줄기는 인상을 몇 번 찌푸리고

온 허리로 안간힘을 쓰더니 끝끝내 불그스름한 꽃

하늘의 치맛자락 밑으로 숨은 부끄러운 꽃을 틔웠다


결국 나에게서 동백이 피어나기 시작하는구나

겨울과는 그제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이별했지만

괜찮아 봄이 오니까


봄이 오니까

춘백(春柏)이다


더는 동백(冬柏)으로 불리지 않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이제야 내게 와서 핀 것이다

아프게 하지 말라는 말은 굳이 기다리지 말라는 말

이제는 다른 이름을 손끝으로 품고 문지르고 거두어 살라는 말


물구나무선 채로 취한 밤을 잘도 건너가는 이가

어찌하지 못하는 내 삶에다 대고 혀를 끌끌 찬다

동이 튼 아침 머리 위를 나는 흰 새의 울음처럼


감히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도 없는 거센 비아냥처럼


부르면 부를수록

적으면 적을수록

확연히 옅어지는 이름이 있다


눈 위에 쌓이지 못하는 봄은 알까

자신을 반기지 않는 이도 있다는 걸


아직 다 녹지 않은 눈이 겨울 뒤에 숨으면

아픈 게 죽도록 싫은

하나의 사람에게 완전히 잊히고 싶은

동백꽃 한 송이 피기도 한다는 걸


꽃아,

언젠가 내게 이 말 한번 해주지 않을래?


지워진 이름이라 조금 더 길게 살 수 있었다고

“나를 죽인 건 너지만 살린 것도 너였단다.”하고


<봄에 피는 동백이 어쩐지 내게는 낯선 사람이라서>, 하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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