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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r 14. 2021

그 겨울 찬 여관방에는

2021. 3. 13


때는 바야흐로 죽은 듯이 걷다

마주친 나비에게도 발길질을 해대던 때

그날도 털이 무성한 겨울 점퍼 후줄근히 걸치고


술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리고

신발 밑창을 시끄럽게 질질 끌며 갔더랬다


이 밤 하얀 달이 꼭 세 개로 보인다며

모르는 사람에게 못난 얼굴로

박박 우겨대던 취한 나를

그 여자가 뒤로 다가와 안아줬는데


글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떡하니

파랗게 놀란 내가 그 여자와

들어간 낡은 여관방은 입구부터 축축했다


아가야, 하는 사람의 품에

태초의 모습으로 구멍 파듯 안기는 일


그날 그 여관방에는

신이 하나도 살고 있지 않아서

나는 어떠한 천벌도 받지 않겠거니 했지


볼품없이 찌그러진 내 머리칼 쓰다듬으며

예쁘다 예쁘다 해주는데

창틈으로 다섯 줄기쯤 되는 달빛이 왔나


그 밤 당신이 여기로 온 밤

우리가 살구색으로 누운 여관방에는

온통 희망찬 꿈이 줄줄 흘러대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평생을 걸 사랑이 생기던데


글쎄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이 환히 살더라니까


다 죽어가는 벌레처럼 한 번만 꿈틀

나는 그런 미동만 할 수 있던 고작이었는데

그 여자와 발맞춰 춘 춤 한 번으로

폭우 앞에서도 펄럭펄럭 날 수 있다니까 이제는


그 겨울의 여관방에는 보일러도 없었는데

우리는 잠깐을 벌벌 떤 적 없었고

다음 날 아침까지도 끈적한 곁이 아닐 리 없었다


<그 겨울 찬 여관방에는>, 하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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