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3
때는 바야흐로 죽은 듯이 걷다
마주친 나비에게도 발길질을 해대던 때
그날도 털이 무성한 겨울 점퍼 후줄근히 걸치고
술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코를 킁킁거리고
신발 밑창을 시끄럽게 질질 끌며 갔더랬다
이 밤 하얀 달이 꼭 세 개로 보인다며
모르는 사람에게 못난 얼굴로
박박 우겨대던 취한 나를
그 여자가 뒤로 다가와 안아줬는데
글쎄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떡하니
파랗게 놀란 내가 그 여자와
들어간 낡은 여관방은 입구부터 축축했다
아가야, 하는 사람의 품에
태초의 모습으로 구멍 파듯 안기는 일
그날 그 여관방에는
신이 하나도 살고 있지 않아서
나는 어떠한 천벌도 받지 않겠거니 했지
볼품없이 찌그러진 내 머리칼 쓰다듬으며
예쁘다 예쁘다 해주는데
창틈으로 다섯 줄기쯤 되는 달빛이 왔나
그 밤 당신이 여기로 온 밤
우리가 살구색으로 누운 여관방에는
온통 희망찬 꿈이 줄줄 흘러대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평생을 걸 사랑이 생기던데
글쎄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이 환히 살더라니까
다 죽어가는 벌레처럼 한 번만 꿈틀
나는 그런 미동만 할 수 있던 고작이었는데
그 여자와 발맞춰 춘 춤 한 번으로
폭우 앞에서도 펄럭펄럭 날 수 있다니까 이제는
그 겨울의 여관방에는 보일러도 없었는데
우리는 잠깐을 벌벌 떤 적 없었고
다음 날 아침까지도 끈적한 곁이 아닐 리 없었다
<그 겨울 찬 여관방에는>, 하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