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9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까, 라는 말이 정말이지 내겐 최선의 선택지였어. 있지, 세상에는 아무리 갈라지고 짓이겨져 하염없이 안쓰러워 보인대도, 함부로 어루만져선 안 되는 마음이란 게 있대. 아마도 잃어버린 사랑의 무너진 마음 같은 거겠지. 그건 꼭 여지를 주는 일이 될 테니까. 하필 모두가 파릇한 봄기운 삼키며 들뜨기 바쁜 이 계절에 아픔을 준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어쩌면 꽤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리고 시달리다, 볼품없이 말라갈 수도 있겠지. 먼저 이별을 말한 주제에 하고 싶은 말은 또 이렇게나 많아. 이 울 것 같은 기분은 잘 추슬러 볼게. 하지만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언젠가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누가 내게 말한 적이 있거든. 물론 그때는 콧방귀나 껴대고 있었지. 네가 낭만을 몰라서 그런 거라고. 네까짓 게 깊은 사랑을 겪어본 적이나 있느냐고. 그런 김빠지는 소리나 할 거라면 다시는 아는 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윽박지르면서 말이야. 그러는 나는 이제 그때 그 사람 앞에 부끄러워서 다신 설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 영원을 약속했었잖아. 여름밤이었나. 비가 하루걸러 하루 오던 때였나. 아무튼, 눅눅하고 고요한 바람이 쏟는 비 사이사이로 은밀하게 불어오던 밤이었을 거야. 약지를 걸어가면서까지 약속한 건 아니지만, 그때 우린 분명 영원을 약속했었어. 이제 와 문득 드는 생각인데, 그때 우리가 조금만 가까이 앉아 두 약지를 걸고서 약속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영원한 건 없다 말하는 사람을 그렇게나 얕잡아 봤던 내가, 나 스스로 굳게 믿던 영원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어. 너무 슬픈데 꼭 슬픔 같지 않은 슬픔을 알아? 하지만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
마지막까지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나를 부디 있는 힘껏 원망해줘. 몇 날 며칠 그렇게 원망하다, 끝끝내 나를 잊어줘. 빛 한 줄기 없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방에 함께 누웠던 것도, 슬픈 노래 밤새도록 틀어두고 온몸으로 흐느꼈던 것도, 그러다 잔뜩 겁먹은 내가 네게서 재빨리 도망쳤던 것도 전부 서서히 잊어줘. 아직 다 녹지 못한 눈이 이 봄의 초입 뒤에 숨으면, 아픈 게 죽도록 싫은, 하나의 사람에게 완전히 잊히고 싶은 동백꽃 한 송이 피기도 한다는 걸 꼭 알아줘.
지금 네가 느끼고 있을 그 허무와 아픔이 얼마큼의 크기로 네 생애를 뒤흔들어댈지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조금의 거짓 없이 사랑을 논했던 그때를 조금씩 꺼내먹으며 주린 마음 채워가길 바랄게. 누가 뭐래도 너는 내게 사랑받았던 사람이고, 나 또한 네게 모자람 없는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니까. 지금은 우리가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싶지만, 언젠가 농담처럼 서로의 얼굴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마주하게 되는 날에 닿는다면, 그때는 꼭 많이 고생했다고 이야기해 줄게. 그때의 너는 내가 지금 놓아버린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만큼 더 근사한 사람이려나. 지금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야, 라는 말은 이 상황에 너무 맞지 않는 말일까. 어쩌면 많이 사랑했었다는 말도, 함께일 때 축제처럼 행복했었다는 말도 이미 전부 거짓이 되었으려나.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 그 여름밤으로 다시 돌아가 너를 애써 피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설령 시간을 완벽히 되돌릴 수 있다 한들, 어차피 최선의 선택이었고 운명이었으며, 당최 피할 수 없는 사랑이었을 테지만. 너를 많이 사랑했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여기까지 와서 이 말이 무슨 힘을 갖겠느냐만.
서로의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기에는 너무 이기적인 끝맺음이었잖아. 그럼에도 나는, 네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삶을 가꾸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 진심이야. 응. 우리가 애지중지 가꾸던 사랑은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버렸대. 이제 그 여름밤은 둘 중 하나라도 기억해주지 않으면, 영영 저 먼 우주 밖으로 튕겨 나갈 모양인가 봐. 별안간 적적해질 때면 가끔 꺼내 볼 테니까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마지막까지 나 혼자만 생각해서,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모난 말만 뱉어대서 미안해. 그래도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