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귀한 사랑이 공중분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그해 초겨울, 나는 내가 굳게 믿는 낭만적인 사랑과 현실의 잔혹한 간극을 인정하지 못한 탓에 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랑할 땐 ‘사랑’만 하면 된다는 건 정말 싸구려 로맨스 영화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일이었던가.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사랑을 하려거든 지독하게 해야지. 조금 지저분해진다 해도, 그래 시방 이래야 사랑인 거시여 하고 더 깊숙이 파고들 생각만 해야지. 기질적으로 발랑 까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번 사랑을 시작했으믄 천하의 망나니가 돼부려야 한다 이 말이여. 알아 듣겄냐 이 화상아. 뭘 덜 떨어진 얼굴로 쳐다보고 앉아있어. 알겠으믄 고개 한번 까딱 움직이면 될 것을 하고, 단골 백반집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조금 취해있었고 식당에 손님이라고는 나 하나가 전부였다.
그 정도 노력이야 나도 죽을힘을 다해서 했어요. 뭘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나는 잔에 남은 약간의 술을 마저 털어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이 방황 하덜 말고 곧장 집으로 가! 식당을 나서는 내게 아주머니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골목은 가로등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을 만큼이나 어두워져 있었고, 한낮에는 적당하던 옷차림이 심한 일교차로 인한 어둔 밤의 쌀쌀함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무작정 걸었다. 아주머니께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나는 곧장 집으로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가 추구하는 사랑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내기 전에는 그 어떤 일상으로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근처 공원의 낡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슬쩍 올려다본 하늘은 설운 납빛 구름으로 붐볐다. 사랑은 말 그대로 ‘사랑’이다. 단어 자체가 지닌 본연의 의미 외에는 그 어떤 첨가제도 필요치 않은 감정. 사랑보다 덜 사랑 같은 것도, 사랑보다 더 사랑 같은 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철이 덜 든 탓이라 핀잔을 준다 한들, ‘사랑’에 현실적 문제와 눈앞에 닥친 상황 따위가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충고는 내게 그저 저 멀리 나는 새의 지저귐 정도가 될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사이를 처참히 갈라놓은 것이라 말하며 나를 떠난 그 사람의 행동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다.
아주머니에게 말씀드린 대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게 정말 너의 최선이었니? 하는 의구심이 속에서부터 일렁일 때마다 나는 그렇다는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았다. 당당히 그럴 수 있을 만큼이나 진심을 다했다. 그 진심의 내용은 아주머니가 조언해주셨던 것과 퍽 닮아있기도 하고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전부이기도 했다.
‘사랑’ 이외의 것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둘 사이의 애틋함을 가꿔가는 것. 미치광이를 자처하여 이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든 감수해내는 것. 나는 평생을 나를 숨기기에 급급한 사람으로 살아왔었지만,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애썼다. 할 수만 있다면 가슴을 활짝 열어젖혀 그 사람을 박동하는 내 심장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도 싶었다. 우리가 한껏 가까웠던 그 당시를 몇 번이나 돌이켜 떠올려 봐도 나는 틀렸던 적이 없다. 서로의 가치관이 달랐을 수는 있을지언정 내가 추구하는 사랑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휘젓고는 결심을 굳게 세웠다. 조금은 불완전한 결심이었지만 충분히 그리 결론을 내릴 가치가 있었다. 이미 끝난 사랑이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나는 당장에 내 일그러진 마음을 돌봐야만 했다. 때로는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만 할 때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조금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당분간만 당신을 몹시 나빴던 사람으로 기억하겠다고, 대신에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을 했던 게 맞고 앞으로도 이렇듯 운명과 낭만이 중심 배경으로 설정된 사랑을 좇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간 충분히 채우지 못했던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진종일 누워 놓친 드라마를 챙겨 보고 책상 구석에 쌓여있는 책들을 한 권씩 꺼내 읽는다. 몇 번이나 필요성을 느꼈지만 쉽사리 구매하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히 데려오기도 하고 맑은 날에 맞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기도 한다. 흐린 날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별안간 쏟는 소낙비만큼 긍정적인 충격도 없을 테니까. 이렇듯 새로운 삶을 위한 도약을 여러 가지 형태로 준비한다. 그렇게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서 다시금 사랑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이 혀끝까지 차올랐을 때, 그때라면 이전보다 훨씬 더 낭만적인 사랑의 꽁무니를 뒤따를 용기가 만발할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사람을 대신할 단어를 찾다가 꼬박 반나절을 지새우는 일. 내가 삼킨 문학의 전부를 뱉어내어도 그에 상응하는 아름다움이 없는 일. 그러다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일. 이다지도 내 세상에 낭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신처럼 전지전능한 그 사람을 우러르고 소원처럼 바라게 되는 일. 모든 악해지는 것들에서 나를 구원한 그 사람을 은혜 입은 자의 숨결로서 섬기는 일. 하늘에게서 밤을 전부 훔쳐서라도 그 사람에게 주고 싶어지는 일. 온몸에 밤과 별을 두른 채 여느 때처럼 눈부신 그 사람과 그 어두운 여백에서 그 사람과 나를 잇는 그저 하나가 되어도 좋은 나를 흐뭇하게 지켜보는 일. 바로 이런 게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사랑일 수 있나.
주변이 한층 고요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곧 희고 둥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마중 나간 손바닥에 멀리서 보는 것과는 퍽 다른 모양의 눈송이가 뾰족하게 섰다. 첫눈이었다. 나는 조금 서러워졌지만 이곳에 앉아 해내고야 말았던 다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올해의 첫눈을 혼자 맞는 것부터가 내 굳은 다짐의 시작이야”라고 읊조렸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문득 술이 반절 정도 남아있던 소주병과 붉으락푸르락하며 핏대를 세우시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생각났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지 않아도 견딜 만했던 그해 초겨울이었다.
2021.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