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깊은 곳에서
글을 한 자도 쓰지 않고 생각지 않으며, 그 어떠한 생산적인 활동도 않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글을 쓰게끔 하는 원동력인 슬픔 따위의 감정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유순한 일상을 사는 탓이다. 이렇게 온전히 쉼을 가질 수 있는 삶이 퍽 달갑고 감사하면서도 전혀 치열하지 않은 물렁한 순간들이 이따금 불안하다.
지금까지의 나는 어떤 명예와 성취만을 필사적으로 좇으며 무던히 애써왔고 그것을 가장 중요시했지만, 이제는 그 무엇도 탐내지 않고서 그저 내일로 걸음을 내딛는 지루한 일 또한 나름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뤄내고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한다는 강박은 줄곧 나를 자멸 속으로 조금씩 떠밀었다. 나는 그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쉬이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자의든 타의든 힘겹게 얻어낸 이 멈춤을 온몸으로 만끽할 것이다. 설령 지금의 이 여유로움이 실은 지질한 게으름이더라도, 이 달콤한 쉼이 비겁한 도피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길 것이다. 훗날 멈춤을 택한 지금의 나를 죽어라 원망하게 된다 한들, 선택이란 늘 그 당시의 나 자신이 고를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최선이 아닌가. 그러는 나는 더없이 여유로운 지금 이 순간에도 한 편으로는 최선을 다한 셈이 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잊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새로운 것을 주워 담는 행위의 중심에는 늘 ‘나’를 꼿꼿이 세워두어야 한다. 스스로를 너절히 내팽개쳐두고서 하는 고민과 해결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나는 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언제든 다시 그것에 미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몹시 반짝인다. 나는 사랑을 좋아하고 글을 좋아한다. 평생을 약속하고 싶은 이와 마음껏 사랑을 나누며 방탕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도, 언젠가는 다시 몇 날 며칠을 읽고 쓰는 데에만 잔뜩 몰두하게 될 그때의 나도 필히 반짝거리며 빛날 것을 안다.
무엇보다 내가 온 마음 다해 사랑하고 있는 여자가 모두 괜찮을 거라 말해줬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분명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이다. 멋진 사랑은 돈이 없고 좋은 옷을 입지 못한대도 울창하게 가꿔갈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이다.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굳게 믿는다. 지금 내 옆에는 엄동설한에도 잠꼬대랍시고 이불을 몽땅 걷어찰 수 있을 만큼 용감한 사람이 새근새근 자고 있고, 나는 이 사람을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다. 장담컨대 이 사랑은 이미 멀리서도 훤히 보이는 숲처럼 울창하다. 이런 사랑의 영향권 속이라면 그 어떤 불안과의 싸움에서도 크게 승리할 수 있다.
나는 요즘 아끼던 글을 잠시 내려놓고 아주 소중한 사람 한 명과 작고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를 이 삶에 주워 담았다. 우리들은 보폭을 맞춰가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중이다. 서로를 지독히도 사랑하면서. 언젠가는 함께 제주에서 예쁜 꽃집을 운영하자는 약속을 되새기면서.
이상하리만큼 춥다는 말이 그리 잦지 않은 이 다정한 겨울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