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태완 May 01. 2020

모과꽃 지는 날

봄을 끝내는 비


이제는 정말 죽어야지 하던 날에
엷고 고운 빨강을 드문드문 걸친
모과나무 한 그루를 올려다본다

저 꽃들 다 지고 노란 모과 주렁주렁 열리면
그거 하나 몰래 따다가 차 한잔 우려먹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살아보자 발걸음을 돌린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죽어야지 하던 날에
부엌 귀퉁이에서 속절없이 지쳐가는
먹다 남긴 통닭 몇 조각을 쳐다본다

그제 저 통닭 함께 나눠 먹은 사랑했던 사람
그 순박한 얼굴 전부 지워지는 날까지만
그날까지만 살아보자 손에 든 무언갈 내려놓는다

간만에 묵은지 찌개를 잔뜩 끓여놓았다
오래되어 쓸모를 영영 잃어가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이렇게 있다는 걸
내 이 두 손으로 똑똑히 증명하기 위해

진종일 찬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내가
창밖으로 무너지듯 저무는 일몰을 따라
이것저것 황급히 주워 담는 까닭은

나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았음을 안도하기 때문이다

비 소식을 전하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가까스로 나를 살린 모과꽃 걱정을 했다
이제 곧 그것들 다 지고 모과가 열리겠구나

모과차 향을 혀로 떠올리며 입맛 다시다
나 자신과 했던 약속 곰곰이 생각하고는
잔뜩 주워 담았던 어떤 것들을 바닥에다 다시 뿌려댔다

나 이제 곧 죽게 될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_
<모과꽃 지는 날>, 하태완
2020. 4. 27 씀.

작가의 이전글 정말이지 실컷 울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