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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y 03. 2020

실패한 사랑

너만은 나를 잊지 마라.


우리는 실패한 사랑
언제나 좁은 곁에 내 편으로 남겠다던 너의 말은
하이얀 눈이 온 세상을 까맣게 삼키던 때
선명하던 색을 빼앗기자 끝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 시신은 제때 수습되지 못하였고
훼손의 정도가 심각하다는 말만 떠돌았다

그날 밤 일그러진 꿈에서 나는
얼굴이 지워진 노루처럼 어딘가로 줄행랑을 치는 너와
두 다리가 멀쩡히 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이 숲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는 너를 뒤쫓지 않는 나를 보았다

그 꿈은 결코 피부가 만져지지 않는 환상이 아니었고
네가 다시는 이 숲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말만 떠돌았다

너만은 나를 잊지 마라
나조차 나를 잊는대도

고작 이 짤막한 두 문장이
기나긴 생의 끝자락에
내가 남긴 마지막 숨이었다

굴곡진 방파제 아래로는
그 속으로 영영 사라진대도 좋을
어떤 것들이 파랗게 출렁였다

너만은 나를 잊지 마라
나조차 나를 잊는대도

내가 이 세계에 남긴 마지막 숨이
검은 파도에 정신없이 휩쓸려 다녔고
이따금 어렵게 고개를 내밀어 벅찬 숨을 헐떡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이 밝았지만 그곳에 나는 없었고
실패한 사랑 하나에 목숨을 끊은 미련한 이가 있다는 말만 떠돌았다


_

<실패한 사랑>, 하태완

2020. 4. 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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