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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11. 2020

영하의 여름에 쏟는 끓는 비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를


내가 만일 끓는 물로 쏟는 비 피할 곳 마련할 수 있다면
꽁지깃 여러모로 신비로운 회갈빛의 산새를
양손으로 공손하게 움켜쥐어 볼 수 있다면

의식 잃은 영혼의 호흡을 되살릴 수 있다면
정말이지 능력 좋아 삼킨 물을 게워낼 수도 있다면 망설임 없이

속절없이 멀어지는 그 사랑 잠깐만 가둬두고
천지가 뒤바뀐 어느 저녁에 하늘을 검게 지르밟다 문득
발이 걸려 넘어진 곳에 뿌리내린 별들을 돌아보고
이 두 손에 여전히 안겨있는 수분을 흩뿌려 줄 것입니다

붉게 물든 살갗에서 점점 껍질이 일어나는 이유는
털어내고 싶은 혈액이 아직도 연명을 핑계 삼아
이 몸의 겉도 아닌 곳을 둘둘 말아대고 있음입니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을 수집하는 여름과
나락에 떨어진 문장을 수집하는 나의 무의식
등으로 떨어진 솔방울에 울컥 성화를 내는 내가
모가 없는 휘파람 소리를 귀로 끌어당기고

눈이 엄청나게 온다는 어느 지인의 속보에
내다 본 창밖으로는 정말로 흰 눈이 쏟습니다

이 여름은 거짓 없이 바라던 것을 얻어냈고
나도 사랑과 사람과 꿈을 내어주고 이것을 얻었습니다 속도 없이

그러니 그대여,
그 어떠한 것에도 간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끝내 바라는 것을 얻게 될지언정
자신도 몰래 내어준 것을 잃었다며 울게 될 것입니다

비는 뜨거웁고 여름은 차가우니 펼친 사랑을 하루빨리 덮어두고
그러니까 나는 익숙한 잠을 당신께 훔쳐서라도 청해야만 합니다
_
<영하의 여름에 쏟는 끓는 비>, 하태완
2020. 6. 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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