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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09. 2020

다시는 당신을 사랑할 일 없는 저녁

죽은 자들의 세상


죽은 자들이 범람하는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머리를 처박고 진종일 흐느끼다
엉덩이를 씰룩이는 개미 한 마리를
날카로운 이빨로 사정없이 베어 물고는 씩 웃었다

사람을 너무 들뜨게 사랑한 나머지
심장이 살갗을 뚫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

그 기괴한 장면을 목격한 몇몇 사람은
인간의 깊은 마음이 붉은색 아니라는 것에
스스로 검은 강물에 제 몸을 퐁당 빠뜨렸다

황급히 주머니를 뒤적거려
바닥으로 내팽개친 것은 다름 아닌 이름
곧장 반대편으로 줄행랑을 쳤음에도
내 주머니는 다시금 그 이름으로 채워졌다

쉽게 떠날 리 없는 누군가의 흔적이
죄 없는 들꽃들 발판 삼아 짓이겨지고 있다

그러니까 내일은 비가 꽤 많이 온다니
입을 옷을 미리 챙기지 않기로 하자고
썩은 혼잣말은 귓바퀴 뒤로 한 바퀴 휙 돌아
멀지도 않은 발치에 맥없이 쓰러진다

산 사람의 언어가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면
장마를 알리는 일기예보를 내내 기다리고
반가운 소식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날이 머지않았다면
옷장을 깨끗이 비우고는 태초의 숨결이 된다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나서 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나를 죽이면서까지 몸을 섞지 말아야지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생을 칙칙하고도 나약하게
쉽사리 마감하는 일은 어제처럼 없게 해야지

죽은 자들이 넘칠 대로 넘쳐 전부 잠긴 세상
그곳에서 가쁘게 느낀 숨 같은 소속감은
등 돌린 사랑 탓에 못다 채운 일말의 미련이어라

다시 살아가며 다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내 이 속을 짙푸른 색으로 덧칠해
하염없이 쏟는 볕으로도 들여다볼 수 없게 해야지
_
<다시는 당신을 사랑할 일 없는 저녁>, 하태완

2020. 6. 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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