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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17. 2020

공허한 여백의 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목이 잘려나간 내가 허파를 찢어가며 웃으면
맞은편의 의사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안도하고
내게서 삐져나간 어떤 두꺼운 껍질 속 얼굴은
가까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 긴 여정을 떠난다

제때 죽지 못한 삶은 이리도 끝없이 지저분하다

이미 절반 즈음 소실된 영혼의 과도한 몸짓은
누군가 부르짖던 연명과 특정 부분 닮아있어서
그리 쉽게 끊어질 법한 숨을 호흡 속에 섞지 않고
지켜보던 숲과 바다와 구름에 속 시원히 욕설을 침처럼 뱉어낸다

호수공원을 에둘러 거닐던 빨간 노을이
주둥이를 뻐끔거리는 잉어의 비늘을 활활 태운다
수다스러운 생명들을 몰살시켜버리기 위함이었으리라

저녁 시간 빨간 벽돌집에서 풍기는 밥 냄새와
소스라치게 놀라는 길고양이의 이족보행이
용케도 나의 식욕을 다시금 돋웠고 나는 우리를 먹었다

쓸쓸한 선풍이 온갖 날카로운 흙먼지를 쓸어가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해결되지 않을 거친 미로
서로 다른 이질적 공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범역은
늘상 그래왔듯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상자를 낸다

한 사람의 깊은 부재가 이토록 서글픈 폐해를 낳았다

그날 밤 내가 쏟아 낸 울분과 점액질의 수분은
마지막을 직감한 장수의 최후 반격과 같았다
죄다 찢어지고 해진 깃발을 거대하게 흔들어 대며
심장부를 관통한 서너 개의 화살을 남몰래 내려다보는 것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먼 미래의 우리가 할 일
여전히 파란 현재에 잠겨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명화 위로 헤엄치는 유명 화가의 늙은 넋을
먼발치의 우주로 그 너머로 너머의 너머로 데려가는 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진실은 거짓과 친밀하고
잔뜩 웅크리고 있던 고요를 우리는 침략하고
선명한 조작에 의해 흐릿한 기억은 침식되었다

일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며 추락하는 애정은
바닥에 부닥치기 직전에 스스로를 태워 분신했다
시키지 않은 말을 하던 입도 잔뜩 오그라들어 버렸다

머리에 핀 곰팡이가 뇌리 깊숙한 곳까지 뿌리 내려
나의 손짓과 발짓은 전기가 끊어진 기계처럼 오작동했다

아무도 모르게 흐느꼈던 때의 짙은 습도와
독극물을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때의 온도를 기억한다

우리가 펼친 건 모두에게 익숙한 전래 동화도
쏟아질 듯 흔들리는 이파리 무성한 나무도 아니었다
별이 빛을 반만 잃어가던 공허한 여백의 밤
달이 열 개는 떠 있었다는 어떤 죄인의 들뜬 자백

오늘 새벽 나는 형상화 된 그것으로 야윈 목을 매었다

<공허한 여백의 밤>, 하태완

2020. 6. 1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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