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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13. 2020

어찌해도 보통의 관계

나도 그 여자도 끝끝내 서로를 벗기진 못했다


나도 그 여자도 끝끝내 서로를 벗기진 못했다
사랑한단 말이 다리만 수십 개 달린 벌레처럼
그렇다 할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생의 저편으로 기어간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온 것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용케도 노루의 언어를 사용하던 손 모양의 나뭇잎
나는 잘 익은 산딸기를 한 움큼 쥐어 먹이랍시고 주었고

그것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하늘 위로 침처럼 뱉어내더니
제 몸 혹독히 아파 낳은 열매로 잔뜩 주린 배를 채웠다
머저리도 아닌 것이 그와 엇비슷한 형상을 풍기며

그 여자의 품에서는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몇 년째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지렁이가
허리를 왼쪽부터 꿈틀거리며 발작 같은 헤엄을 쳤다

잃은 빛을 다시 밝힐 방도가 없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어둠에 어둠을 덧칠하면 손톱으로 긁을 것이 많아지는데
술집에서 마주 앉아 나누던 사랑은 전부 게워냈는데
나는 속옷 한 장 입지 않고 그 여자가 빠져나간 곳에서

눅눅하고 어스름한 가로등이 재수 없게 찔끔 오는
이 비와 저 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피를 리터 단위로 흘린다
어차피 바닥에 떨어진 건 검은 아스팔트가 모조리 삼켰으니

역시나 나와 그 여자의 사랑은 시퍼런 시체가 됐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흔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아
파리고 쥐고 바퀴벌레고 하는 것들이 전부 꼬였다

익힌 것은 맛보아도 괜찮다는 누군가의 가르침에
겸손한 학생의 혓바닥으로 우리는 서로의 몸을 핥고
아직 핏기가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목덜미는 되도록 피하고
그 밤을 칸칸이 나눠가며 진종일 신음하고 신음했다

연애는 무슨 얼어 죽을
숱한 날들을 불 꺼진 방의 천장에만 얹혀있었으면서
우리는 서로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지도 몰랐다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동굴에서 벌벌 떠는 박쥐처럼

나도 그 여자도 끝끝내 서로를 벗기진 못했고
벌거벗은 몸을 징그럽게 부대끼는 것 말고는 딱히
사랑이라 할 법한 것을 주고받은 적 없고
배배 꼬인 손가락이 실컷 울었던 기억만 둥둥 떠 있다

낯선 심장을 세게 움켜쥐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가시 잔뜩 돋친 사과를 품에 넣어두고 시간을 가지면
전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영영 잊을 수도 있다

사랑이었지만 사랑이 아니었고
사랑한 적 없었고 사랑받은 적 없었다
서로를 부둥켜안아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끈적하게 오열하는 것만이 우리가 나눈 사랑의 전부라


<어찌해도 보통의 관계>, 하태완
2020. 6. 1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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