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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21. 2020

 긴 여정을 끝낼 우리에게

빌린 여름도 갚을 시간이네요


정녕 나를 잊으려거든 그 삶에서 이 시를
검은 점 하나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주세요

흔들리는 것이라면 새로 돋은 연녹의 손가락인들
당장에 잘라내는 일 또한 서슴지 않을 테니

당신이 비운 자리는 진종일 별이 지지 않아서
불빛 하나 없이도 뱉은 말을 똑바로 조립할 수 있어요

그곳은 어떤 색이 폈나요 수국은 졌으려나요
나눴던 밤엔 비가 그쳤어요 감긴 눈은 잠들었네요
어제는 손등에 고양이가 앉았어요 슬픈 입이더군요
너무 낯선 침묵 때문에 숨을 오래도 참아왔어요

유별난 바람이 꼬리를 숨기지도 않고서 날아요
졸졸 따라가다 이 마음 숨죽이고 왈칵 쏟아요
거긴 섣불리 가기엔 너무 머네요 신이 다 해졌어요
어느덧 갈증이 올 시간이죠 주워 담을 것이 많아요

작별을 섬긴 적 없으나 목숨을 걸 수는 있어요
그러니 다시는 내가 눈 담은 것에 섞이지 마세요
하루 새 자란 추억이 무섭거든 서로 문을 꼭 잠가요

제멋대로 부쳐지는 엽서라도 이름은 꼭 지워요
소식이 머리 위를 날면 고개를 숙이고 지나쳐요
해가 중천인 낮을 어렵게 맴도는 외더듬이 나방처럼

매일 천천히 놓아요 안은 품은 섭섭하지 않대요
기대가 높지 않으니 발 헛디딜 일도 없을 거예요
야윈 춤은 보기에 흉하니까 하루빨리 손뼉을 쳐요

구름만 같은 사람아 어쩌다 속엔 눅눅함뿐이어서
그을음만 지던 애정은 하다못해 젖어버렸으니
그 울음만 마저 쏟고 잘 가 안녕히 곱게 인사해요

마지막 맞춤이 눈이든 입이든 잘 가요 안녕히요

이곳은 어떤 색이든 온통 필 테니 개의치 마시고
저무는 일몰보다 애틋이 걸어요 오늘은 섬엘 갈래요

빌린 여름도 갚을 시간이네요 잠은 충분히 자야죠

버릇이 손을 빌려 일을 꾸며도 문득 속지 마세요
찰나 같던 삶의 속편은 이제 충분히 읽히고 접혔으니
여기까지 감사했어요 거기까지 그만 끝이네요
_
<긴 여정을 끝낼 우리에게>, 하태완
2020. 6. 20 씀.
사진 instagram @a__mong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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