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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l 05. 2020

2020.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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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네가 술을 마시다 말고 바다에 가고 싶댔잖아. 눈 안의 눈 하나가 어찌나 맑고 고왔던지 지금은 시간이 조금 늦었으니 다음에 가자, 라는 말을 나는 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속 어딘가에서 잃어버렸거든. 원래 사람들은 보통 ‘바다’하면 하늘 맑을 때 저 멀리까지 탁 트인 해변과 수평선을 차례로 내다보는 것을 떠올리지 않나. 그렇지만 너는 줄곧 어두컴컴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바다를 좋아했어. 발치에서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치는 파도 울음을 듣고 있자면 네 삶에 필연처럼 찾아오는 슬픔이 고작 우연일 뿐인 게 되는 것만 같다고, 정말이지 별일 아닌 게 되는 것만 같다고 너는 말했어. 그러곤 문득 내게 입을 맞췄었던가. 그래 너는 꼭 글을 쓰는 나보다도 더 멋진 문장을 무심히 던진 후에는 내게 입을 맞췄었지. 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더는 생각지 않기로 했어. 사실 그건 그 장면 그대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으니까. 어차피 내가 쓰는 글의 팔 할에는 네가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서 우아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날 그 밤의 바다에는 우습게도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잖아. 네 가방에 작은 우산 하나가 있는 것을 나는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는 보기보다 준비성이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날 함께 찍은 휴대폰 동영상 속의 우리는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고 있더라. 조급함이나 짜증 같은 비루한 감정을 얼굴에 얹고 있지도 않았어. 그 속에는 얼른 아무 말이나 한번 해봐, 라며 소리치듯 말하는 너와 응? 아, 어, 그러니까 여기 너무 좋아, 그리고 진짜 사랑해, 라고 말하는 내가 있고, 그 뒤로는 간혹 파도의 인기척 정도만 느껴질 정도로 칠흑 같은 바다가 고요히 펼쳐져 있어.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잔뜩 쏟아진 향수처럼 지나치게 퍼질 때면 꼭 찾던 동영상이었는데. 어젯밤, 마지막으로 두어 번 반복해서 재생해보고는 냅다 지워버렸어. 영영 지워버렸다고. 동영상 하나 지우는 데에 뭐 그리 호들갑이냐고, 너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신경 곤두세우는 버릇 여전하구나, 라며 지금 당장에 네가 말을 걸어올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정말 마지막이었거든. 이미 다 녹아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놓지 못하는 희망 같은 거 있잖아. 하나도 부질  없는 거. 그런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너와 내가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유일함이었어. 그래도 놓아줘야지. 이제는 정말 막다른 길임을 인정해야지. 발이 나아가는 방향을 아주 조금만 틀면 저기 새로운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있잖아, 나 오늘은 정말로 바다에 가고 싶었거든. 그런데 하필 아침까지만 해도 바삭하게 말라 쾌청하던 하늘이 어느새 누가 물이라도 한 솥 가득 부어놓은 듯 젖어있는 거야. 그래서 가지 않았어. 비 오는 날 밤의 바다를 마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한번 손에서 훌훌 털었던 걸 다시 쥐면 아주 큰 일이 날 것만 같았어. 너는 줄곧 어두컴컴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바다를 좋아했어. 나는 그런 너를 위해 평생토록 비 오는 날 밤의 바다를 포기할게. 맞아. 나 네 말대로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도 온 생애가 뒤흔들릴 만큼 헤픈 사람으로 살고 있어. 그러니까 여전히 말이야. 오늘 바깥 한번 내다본 적 있어? 비가 정말 많이 와. 그때만큼은 아니라도 정말 많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나는 물론이고, 너까지도.

2020.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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