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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l 07. 2020

시든 얼굴

사연을 올려놓을 수 있는 둥근 달


몇 해 사이 몰라보게 야윈 나의 주린 생애를
일일이 세어보기도 그런 활자들로나마 채우려
그간의 고독과 잠식되었던 시간 허공으로 펄펄 날리는
옛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어 머리맡에 잠시 놓아둡니다

귓전을 사정없이 때리는 매미들의 규칙적인 오열에
나도 모르고 그대도 모르는 초자연적 홀림 같은 것으로
방금 막 잠이 들었을 시집을 부채인 양 우아하게 뒤흔드니
창백하고 둔중한 사진 한 장이 바닥으로 삶처럼 투신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제는 잔뜩 휘어진 옛 애인의 초상
꽤 분하지만 이는 나보다도 어린 운명의 시시한 장난

고작 손 얼룩 덕지덕지 묻은 허름한 사진 한 장
어찌저찌하여 나의 오늘에 살포시 온 것뿐이지만
그해 여름을 전부 실은 육중한 몸으로 세게 들이받는 그 삶에
나는 경적 한번 듣지도 못하고 치여 죽은 듯 꼼짝 못 했습니다

온종일 시달리던 가여운 심장을 조금 쉬게 해주고자
성난 걸음 어르고 달래며 나온 밤의 하늘은 너무 아득했고
끝끝내 닿을 수 없다는 걸 위쪽 사람들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목이 저려온들 그 흔한 시선 한 줄기 거두지 않습니다

쟁반처럼 넓고 둥근 달에는 사연을 올려 둘 공간이 넉넉하고
그 사연을 가져다가 남몰래 읽어 보는 존재도 있다 했습니다

다시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옛 애인 사진 그 넓은 달에 슬쩍 올려두고
그 사람이 내 사연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기를
황급히 주워다가 오래 읽게 되기를 문득 빌었습니다

<시든 얼굴>, 하태완

2020. 7. 7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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