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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l 01. 2020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는 날

나는 이미 죽은 그 애를 자꾸 파헤쳤다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는 날이면
나는 이미 죽은 그 애를 자꾸 파헤쳤다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려놓아도
움찔하는 문장이 꼭 한 줄씩은 발견되는
그러니까 최후의 수단 같은 것이었다

잘만 하면 이 시가 그 애의 삶에 불쑥 당도해
빛으로 차오른 웅덩이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눈이 벗겨져 초점을 찾는 그 찰나의 틈을 노려
다시금 내가 그 애 앞에 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파란 물고기처럼 추위에 떨고
망초꽃 군락의 중심부에 털썩 앉아 화해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 애로부터 끝도 없이 출발하는
어린 질문 같은 시어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 밤 지새워가며 받아 적었다
밤하늘 너머에서
뿌리째 뽑혀 영영 낙하하는 별을 봤을 때도
고르지 못한 호흡을 되찾는 데에만 열중했다

전해질 리 없는 편지가 또 발송됐다
매번 같은 길을 가는 우편집배원이
퍽 지루한 표정으로 내 손금을 살피다
소식 없는 그해 여름을 목에 걸어주었다

그 애의 기약 없는 부재 안에서 나는
날마다 목을 세게 조여오는 매정한 그해 여름을
만지작거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는 날>, 하태완
2020. 7. 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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