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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l 10. 2020

오늘도 어김없이 당신의 이름을 줄줄 읊었지

기다리는 일이 제법 길어지면


고단한 눈시울 위로 죽음 같은 석양이 불쑥 드리우고
점차 속도를 내는 오늘이 나를 등지고서 멀어질 때
정든 기억을 비옥한 살갗에 심고 애써 가꾸면
누구나 다 우러르는 애틋한 밤이 피어나곤 했다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돋아난 그늘이 야금야금
나를 온통 뒤덮기 시작하면 나는 당신을 애타게 찾다가
마르지도 않는 허파를 양손으로 세게 쥐어짜고는
그 자리 그대로 철썩 주저앉아 파도처럼 울었다

가지를 양껏 뻗어 나를 품으려는 몇 그루의 나무
날카로운 것이 없어도 나는 섣부른 팔을 쉽게 잘라냈다

언젠가 내가 안아주는 이는 당신이 마지막이라고
당신의 생애를 억겁의 세월 동안 품는 만년설이 되어
비수처럼 빨갛게 쏟아지는 악랄한 피의 볕으로부터
당신의 억울하고 힘껏 젖은 추락을 막아주겠다 한 적 있었지

이제는 증발하는 토사물처럼 희끗해진 사랑과 맺은
어리석은 약속 따위를 핑계 삼아 나는 너무 많은 호의를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파괴자의 심정으로 냉큼 잘라냈지
그 찰나의 틈을 통해 내 목숨 조금씩 도둑맞는 줄도 모르고

포말의 생멸보다도 잦은 빈도로 당신의 이름을 줄줄 읊었지

어디에 놓고 온 지도 모르게 잔뜩 잃어버린 것들은
무궁한 꿈으로 와 나를 천천히 갉아먹고 꺼진 만족을 채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제법 길어지면
제 갈 길 가는 솔향기 한 줌에도 화들짝 울고
약속이 급한 어제에 발이 빠져 저절로 기는 꼴이 되고
그러다 악몽에 뿌리내린 파란 잎사귀로 자라나고

그 위로 애틋하게 피어난 밤의 가장자리에 숨을 걸고는
실수도 없이 그래선 안 될 발을 모두 헛디디고 마는 거다

<오늘도 어김없이 당신의 이름을 줄줄 읊었지>, 하태완

2020. 7. 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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