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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l 26. 2020

러브레터

2020. 7. 26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이런 나에게는 여전히 버거운 난제로 여겨집니다. 아직 내 삶의 깊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짐들을 치울 마땅한 곳조차 찾지 못한 마당에, 어찌 감히 그곳에 귀중한 누군가를 들이고 식사를 대접하는 일을 뻔뻔스럽게 행할 수 있을까요. 그러는 나에게 이 모든 겁을 스스로 집어삼키게 할 만큼 애틋한 사람 하나가 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한철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그 사람을 처음 마주했던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내가 비좁고 텁텁한 길을 방금 막 빠져나온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마음이 자신의 무게를 줄여 입을 향해 튀어 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길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온몸의 근육들이 심장의 요란한 고동 몇 번에 뼈도 못 추리고 흰 수건을 멀리 던졌습니다. 그 정도로 그 사람, 퍽 예뻤다는 말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를 나의 삶에 무작정 초대하는 일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해맑은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서는 손님이라면 더더욱. 어쩌면 나조차도 죽음 직전까지 설명해내지 못할 나의 의미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지금 당신을 대하고 있는지를 그 사람에게 어떻게든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편지가 채 가닿기도 전에 얄미운 오해가 쌓이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서로가 서로에게 심어놓은 믿음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썩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 사람과 함께 부산의 바닷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해가 눈꺼풀만큼 저문 시간에 조용한 해변을 찾아 정말이지 깊고 오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맞은편 저 멀리 광안대교가 보이는 자리라면 좋겠습니다. 취기가 조금 올라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나는 너의 나와는 많이 다른 것만 같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그러는 너는 이 별 볼 일 없는 몸과 마음 중에 어떤 부분이 마음에 닿았느냐고. 그동안 사는 게 너무 버겁지는 않았냐고. 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내 목숨보다도 아끼고 있다고. 그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다고. 네가 나로 인해 삶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덜해지기를 바란다고. 내가 정말 잘할 테니까 너만은 나를 버리지 말라고. 해치지 말라고. 내가 더는 찢어지고 부서지지 않게 옆에서 지켜달라고.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 내 야윈 손이라도 괜찮다면 힘껏 잡아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혹시 부담이 아니라면 너도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느냐고. 그렇다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조심성 없는 사랑을 내내 나누자고. 어쩌면 나에게 너의 무거운 삶 전체를 짊어질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이처럼 수많은 질문을 냅다 던지고는, 그 사람에게서 더 많은 대답과 질문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어찌해도 만나고야 말았을 그 사람과의 남은 계절이 몇 개나 될지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그보다 하루 끝에 어지럽게 서서 지친 걸음을 어딘가에 털썩 앉힐 때, 물 한 컵보다도 우선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한 수 위인 겁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당신이 왠지 모르게 참 소중합니다. 러브레터에는 영 소질이 없어 미안합니다. 저는 사람을 무척 무서워하지만, 사랑을 습관적으로 기피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처럼 운명이라 여겨질 만큼 농도 짙은 사랑이라면 더욱이 피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어쩌면, 처음 서로를 강한 힘으로 당기게끔 했던 다른 점 탓에 다투는 날도 잦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서로에게 오랜 비수가 될 수도 있는 말을 무심코 던질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저기 뒤로 숨겨놓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이빨과 입술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는 표현을 제때 꺼내주기로 하는 겁니다. 단정히 접어두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아픈 말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없는 말은 여기까지만 하고, 미숙하기 짝이 없는 편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실컷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 가파른 손 틈 사이로 줄줄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 채워진 식탁에 우리 마주 앉아, 끝도 없을 빨간색 마음을 서툰 젓가락질로 집어다 가늘게 떨리는 입으로 가져가는 겁니다. 그 마음들은 씹을 때마다 사랑해,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나는 모양이네요. 조금 유치하지만, 당신 덕에 훨훨 날아갈 듯 기분 좋은 청록의 칠월입니다.

2020.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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