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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Aug 09. 2020

여름 여행

빨간 튤립을 쭈뼛쭈뼛 건낼게


  우리의 끝은 과연 어떤 모양일까. 어쩌면 고맙게도 우리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마지막과 얼굴을 맞대고 앉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너는 내 옆에 앉아 톡톡 튀는 열대 과일 향의 와인을 마시고 있고, 꽤 만족한 표정을 하고서 내 부끄러운 두 눈을 이렇게 이렇게 쳐다보고 있어. 그러니까 너에게 어느 정도 진심이었던 내가 너를 조금 더 진심으로 생각하게 된 것만 같은데, 끝이 없는 것처럼 내내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사고처럼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네 차가운 웃음을 두려워하는 약한 마음이 이 멍한 머릿속에서 격렬히 다투고 있는 거야. 그러는 와중에 네가 나를 애틋하다는 듯 쳐다보며 건네는 금가루 같은 말들이, 내 망신스러운 불안을 잔뜩 치장해서 결국엔 내가 맥없이 실실 웃게끔 하는 것이 아닐까.
  드문드문 비가 쏟는 이 여름의 부산은, 어설픈 우리를 한참이나 먼 곳만을 응시하는 망원경 같은 사람들로 만들었어. 아마도 너는 나보다도 훨씬 먼 곳을 찾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한 공간이라도 찾는 듯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런 너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는 일이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던 거 있지. 잔뜩 흐려진 하늘을 대신해서 기분 좋게 화창한 어떤 장면이 며칠 전의 내게는 있었던 거야.
  너와 함께 하는 나름의 첫 여행이었잖아.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여행 계획은 물론이거니와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걸음을 떼 본 적도 없었던 게 부끄러워서, 나는 괜스레 이런 미숙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꽤 애를 썼던 것 같아. 제발 마음에 들어라, 제발, 제발, 하는 마음으로 예약한 바다가 훤히 보이는 호텔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너는 불평 한번 없이 내가 고심 끝에 고른 장소를 마음에 들어 했어. 참 별것도 아닌 일에 가슴을 세게 쓸어내릴 만큼이나 고맙더라고.
  더위를 병적으로 많이 타는 나 때문에, 너는 그 잠시를 쉬지도 못하고 내게 걱정스러운 마음을 사방으로 건넸어. 그럴 때마다 정말이지 더위 앞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나는, 아주 멋스럽지 못하게 상한 속으로만 ‘퍽 시원한 계절이 오면 네가 조금 더 즐거울 수 있는 여행을 떠나게 해줄게.’라는 말만 몇 번을 되뇌었는지 몰라. 네가 좋아하는 꽃이 더 많은 곳으로, 네가 좋아하는 담백한 음식이 더 많은 곳으로,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훨씬 더 가득한 곳으로 떠나는 날이 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그래도 이번 여행에는 크게 웃는 네가 많았던 것 같아. 나와 노는 게 재미있어서건 아쉽지만 따로 네 나름 재미있는 일이 있었건 간에, 너의 큰 웃음을 목격하는 일이 내게는 간절히 가지고 싶었던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 나와 있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말해주는 게 나에게는 가장 선명한 칭찬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사실 나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너를 만나는 일과 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가장 행복하거든. 나에게 있어서 너는 충분한 행복이라고. 언젠가 네가 나에게 주섬주섬 건넸던 작은 쪽지에 적혀있는 아득한 말처럼, 나의 행복 전도사가 되어주겠다는 그 말처럼.
  그날, 얼굴을 마주한 채로는 미처 다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제야 전해. 내 씻기지 않을 아픔에 나보다도 더 서럽게 울어주는 너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에게 이런 사람 하나가 왔다는 사실이 하나도 믿기지 않아서,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치사한 존재의 나쁜 장난에 바보처럼 속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너 하나만의 언어와 몸짓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되니까, 나로서는 그간 수도 없이 놓치고, 지나 보내고, 쏟아내고, 비워냈던 기적을 한 번만 더 믿어 볼 수밖에 없는 거야.
  내 이런 속내를 접한 지인들도 하나 같이 같은 말을 해주곤 해. 그것참 운명이라고. 인연이라고. 우스갯소리로는 결혼 선물로 냉장고 한 대면 충분하겠느냐고. 그럴 때마다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며 황급히 손사래를 쳐댔지만, 이미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우리가 좋아하는 색깔들로 채색까지 끝마친 순간이나 장면 같은 것들을 더는 의심할 수 없겠더라고.
  아직은 많이 조심스럽지만, 네가 잠든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날이 조용한 걸음으로 내게 뚜벅뚜벅 왔으면 좋겠어. 우리가 맞잡은 손 틈 사이로 영영 흘러 사라지는 것들이 없도록. 그러다 서툰 솜씨더라도 내가 직접 차린 아침 식사를 네가 맛있게 먹어주는 날까지 여기에 주어진다면, 나는 분명히 엉겁결에 근사한 어떤 걸 주운 사람처럼 흥에 못 이겨 폴짝폴짝 뛰어다니게 될 거야.
  비가 많이 와. 올해 장마는 꽤 많은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해.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이렇게 바라기도 하겠지. 이 여름이 이제는 조금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충분히 오랜 시간 이 계절에 안겨 있었으니 이제는 다음 차례라고. 그러니까 마치 우리가 겨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머지않아 가을이 올 테고, 그 가을이 힘을 잃고 휘청거리면 그 자리를 겨울이 잽싸게 차지하게 될 거야. 그때는 내가 너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빨간 튤립을 한 아름 사다가 너를 만나러 갈게. 네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여태 몰라줘서 미안한 마음을 잔뜩 얹어서. 네가 나와 함께 있고 싶다던,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은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빨간 튤립을 선물할게.
  혹시 모를까 봐 덧붙이는 말인데, 빨간 튤립의 꽃말은 ‘사랑의 고백’이래. 여러모로 고백하고 싶은 사랑이 지천에 묻어나는 밤이야. 아무튼 네가 나에게 선물해 준 이 잊으래야 잊을 수 없을 여름을, 나는 옷장 깊은 곳에 걸려있는 겨울 코트 주머니에 꽁꽁 숨겨둘게. 혹여 바보 같은 내가 너에게 이토록 감사한 마음을 홀랑 잊은 채로 겨울을 맞게 된다면, 그 코트를 무심코 꺼내 입으며 발견한 이 여름에 뒤늦은 사과라도 건넬 수 있게끔 말이야. 그런 때가 온대도, 나는 어김없이 너에게 빨간 튤립을 쭈뼛쭈뼛 건넬게. 이를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건네고 싶다는 내 들뜬 마음의 대신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2020.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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