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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Aug 22. 2020

소나기

2020. 8. 22

  한바탕 비가 또 쏟아져. 깜짝깜짝 놀라는 일에는 워낙에 익숙해진 터라, 겸해진 천둥 번개 따위에는 눈도 깜빡 안 하는 거 있지? 비는 이제 지긋지긋 하다고 손사래를 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방금 막 윗머리가 축축하게 젖는 것도 모르고서 창밖을 꽤 오래 내다보고 오는 길이야. 정말이지 비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가득히 쏟고 있는데, 난 말이야, 그러니까 엄청 선명한 무언가를 똑똑히 본 것만 같다니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날들이 내일처럼 이어지고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잔뜩 예민해지기 일쑤고, 어제는 괜한 사람에게 별 시답잖은 일 하나로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거든. 저 멀리 보이는 낯선 사람 더 멀리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당장에 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배가 부르건 제대로 걷기도 힘들 만큼 배가 고프건, 잠을 푹 잤건 채 삼십분도 잠 이루지 못했건 다짜고짜 울컥하고 마는 거야.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굳이 파헤치고 싶지는 않은 거, 너도 그 기분 알고 있지? 너도 눈 밑까지 차오른 눈물 꾸역꾸역 다시 밀어 넣느라 꽤 애를 먹고 있는 거 맞잖아. 막 사방이 밋밋한 단색으로 뒤덮인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잖아. 이왕이면 전부 눈이 멀어버릴 만큼 휘황찬란한 것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단지 배가 고픈 도둑이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하필이면 그 흔한 행복이 부재한 도둑으로 전락해버렸네. 지금의 나는 쟤가 가진 것들과 얘가 가진 것들 중, 좋은 감정이라면 그들이 잠든 틈을 타 전부 훔쳐 오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 있어. 어쩌지. 나는 분명히 너를 미친 사람처럼 사랑하고 있음에도, 다시금 애타게 불행을 찾아 스스로 깊은 칠흑에 잠식되려 하고 있어.
  지도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확 도망쳐버릴까. 네가 아니고서야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영영 사라져버릴까. 너에게 진종일 나를 찾아 헤매야만 하는 지독한 수고를 떠넘기고 싶지는 않지만, 혹여 네가 숱한 노력을 세게 뭉쳐 내가 숨은 곳을 용케도 찾아낸다면, 우리는 그 시점으로부터 마지막 호흡을 뱉어낼 때까지 함께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일종의 구조요청 같은 거라고 하자. 미숙한 사랑의 고백이며, 지질한 청혼 같은 거 있잖아. 미안하지만 나는 별이 될 수가 없어. 내내 빛을 머금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래도 괜찮다면, 다 떠나서 너만 괜찮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다 버려두고 저기로 저기로 먼저 도망칠게.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이성처럼 제자리를 되찾았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날들은 여전히 내일처럼 이어지고 있지만, 나는 지금껏 잘해왔듯 웬만한 일에는 슬픈 표정조차 짓지 않을 거야. 여전히 좋아해. 변함없이 사랑하고. 하루빨리 품 안 가득히 안고 싶어.
  너도 오늘 잠깐 쏟은 비를 보았어?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너와 가고 싶은 곳이 또 하나 생겼어. 이곳의 비는 잠깐 사이에 그치고 말았지만, 언젠가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유럽 한 골목의 와인바에서 네게 가장 맛있는 술을 사주고 싶어. 이 먼 곳까지 나와 도망쳐줘서 죽을 만큼 고맙다는 말도 슬쩍 건네면서. 꿈만 같겠다. 영원히 기다릴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릴게. 영원한 것은 없다고 아랫입술을 삐죽이면, 기꺼이 다이아몬드가 되어 줄 수도 있어.

202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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