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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Sep 02. 2020

겨울로 가야만 한다

2020. 9. 2


  일 년 내내 겨울인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늘이 무서우리만큼 하얗고, 두꺼운 옷가지 밖으로 드러난 목덜미며 손등이며 하는 무방비의 살갗에 차가운 햇빛이 내려앉는 곳. 어제 거닐었던 장소를 오늘 다시 찾으면, 움푹 팬 그대로 얼어붙은 내 발자국이 기다리는 곳. 땀을 흘리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니, 그 원망의 마음이 숲속 이곳저곳을 떠돌다 결국 이러한 생각까지 닿게 된 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얼음이 이제 막 봉오리를 찢고 나온 꽃처럼 피어있는 나무를 본 적이 있다. 문득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운 선술집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잔혹한 한파로 정신 차릴 틈 없는 바깥과 달리 한껏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더운 이야기를 잔뜩 쏟아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쩌지. 나는 아직 더워지고 싶지 않은데.
  도망치듯 그곳에서 뛰쳐나와 다시금 얼음꽃 잔뜩 피운 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그럴 리 없는 얼음들이 조금씩 녹아 흰 바닥으로 투신하고 있었다. 갑자기 외로워진 앙상한 가지가 돌아오지 않는 얼음과 직경 일 센티미터 남짓한 구멍이 뚫린 회백색 바닥을 처량히 내려다본다.

  아마 그때부터였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가 영원히 아무것도 녹거나 흐르지 않는, 내내 겨울뿐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병적으로 하기 시작한 게.

  어린 시절, 나는 누군가에게 비난받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했다. 세상 어느 누가 비난받는 일에 익숙하겠느냐만, 정말이지 나는 심각할 정도로 그러한 순간에 놓이는 것을 무서워했다. 우려했던 상황을 겪은 날이면, 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머리며 가슴팍이며 허벅지며 하는 신체 부위를 꽉 쥔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곤 했을 정도니까.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어린 나이에,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고 서러웠을까.
  이제 와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자기 자신을 폭행하고 경멸하는 내 작디작은 모습만 분명히 그려서 퍽 속상할 따름이다. 그때는 정말 내 몸과 마음 중 어느 하나 녹아내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종일 무더운 여름이었다. 창밖으로 세찬 눈발이 쏟아도 나 혼자만 완연한 여름이었다.

  외로웠던 걸까. 가족들의 충분한 애정에도 감히 만족하지 못하고 외로워했던 걸까.

  나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늘 믿어왔다. 하나는 이 생을 그만 놓고 싶다는 생각을 습관처럼 해대는 추악한 영혼이고, 또 하나는 그 심술궂은 영혼의 추태를 중재하느라 늘 애를 먹는 안쓰러운 영혼. 전자의 영혼이 급작스러운 난동을 부릴 때면, 후자의 영혼은 매번 같은 말을 내뱉어 긴박한 상황을 어렵사리 종료시키곤 했다.

  하지 마. 제발 그러지 좀 마. 악몽 같은 삶을 스스로 꾸려 하지 마. 흐릿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저 먼 내일을 애써 헤집어 보려 하지 마. 우리는 날 때부터 끝끝내 복구할 수 없는 오류투성이인 채로 여기에 던져진 거야. 몸을 누인 자리에 누군가의 비난이 비눈처럼 묽게 쏟아진대도, 눈 뜨지 말고 입도 벌리지 마. 어쩌다 마주친 짐승의 사체에 네 모습을 썩힌 채로 대입시키지 마. 어떤 일이든 그 목숨을 걸 만큼 중요히 여기지 마. 죽지 마.

  어찌저찌 죽지 않고 지금껏 살아냈지만, 과연 이런 나를 끝까지 품고 가줄 사람이 이 세계에는 있을까. 나와 일 년 내내 겨울인 곳으로 가 삶을 꾸릴 사람이.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나누는 안부 전화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내 안쓰러운 영혼이 생명을 다했을 때,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을까. 영원히 아무것도 녹지 않을 거라고, 더는 내가 속절없이 흐르는 것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주겠다고 말해줄 사람이.

  이 순간에도 무언가는 계속 녹고 있고, 잔뜩 조여진 등줄기를 따라 한 줄기씩 흐르고 있다. 나는 역시 온통 흰 겨울로 필히 가야만 한다. 더 늦지 않게. 내가 정말 죽어버리기 전에. 웬만해선 해가 뜨지 않는 깊은 겨울로 가야만 한다. 언제든 내가 나를 버리고, 가장 뜨거운 진실을 무심코 숨길 수 있는 곳. 무섭도록 냉랭한 세계, 그 겨울로 가야만 한다.

2020.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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