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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Oct 02. 2020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뿐이더라

이 시국 일기 (1)

2020 코로나 시대가 벌써 반년이 넘어갔다. 4년 차 독립된 해외 살이를 하고 있는 나에게 반년 간의 키워드는 조울, 포기, 인내, 심심해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초부터 현재까지 정말 하루하루 도를 닦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대학 시절 자기 경영 수업의 핵심이던 '잃어야 얻는다'를 하루에도 수십 번 한숨 섞어 읊조리면서.


신나게 한국에서 연말 휴가를 마치고 1월 첫 주에 돌아오자마자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을 뒤덮기 시작했다. 1월, 2월은 한국의 상황을 뉴스로 접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느라 스트레스를 받던 기억뿐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의 건강이 걱정되었고, 위기 상황에서 내가 같이 옆에 있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루는 밖에 나들이를 다녀오신 부모님께 울며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가만히 여기 이러고 앉아서 한국의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드니 제발 돌아다니시지 말라고.


코로나가 아시아를 넘어 육 대륙으로 퍼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곳도 3월부터 전파는 시작되었다. 이미 코로나가 번지고 있었던 알프스 지역에 스키 여행을 다녀온 용감무쌍한 관광객들 덕이었다. 앞 집 이웃들도 스키 여행을 다녀온 후 확진을 받은 터라 코로나의 전염 속도와 위험성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 하루에 몇 백 명씩 확진자가 나오는 양상을 보았던 터라 혼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알게 모르게 두려움이 사로잡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나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예민하다. 뭘 그렇게까지 스스로 격리를 하냐.'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부터 지금 반년이 지난 시점까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격리 수준은 유지하고 있다. 그게 나를 돌보는 동시에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도 않는 확실한 방법이니까.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도 격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이 더러 있다. 이번 코로나 덕에 나는 현재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의료 정책과 국민성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다. 이곳은 아프면 1차적으로 General doctor를 찾아가게 된다. 병원이라기보단 가정의원이라는 말이 맞는 그곳은 '아파요' 하면 'Be Patient (침착하게 지켜보세요)'라는 답변이 종종 돌아온다. 'Excuse me, but I am already a patient (저기 죄송한데 제가 이미 환자거든요).' 하고 받아치고 싶지만 늘 참는다. 코로나 역시 마찬가지다. 중증 환자가 아닌 이상 병원은커녕 의원에도 갈 수가 없다. 그저 통화로만 의사와 소통한다. 아파서도 안되고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면역력 강화를 중시하는 의료체계 때문인지 몰라도 이 나라 사람들 역시 자신은 역병도 피해 가는 강철 체력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초반에 전파가 시작될 땐 '그냥 감기 아니야?' 하던 사람들이 정부가 심각성을 뒤늦게 받아들이고 락다운을 시작하자 패닉 하며 식료품과 휴지를 쓸어가는 걸 보며 기가 찼지만 다행이라 여겼다. 휴지는 왜 그렇게 챙기는 것일까... 비데가 없어서?


길에 방역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커녕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7월 정도에 들어서야 비로소 대중교통 이용 시 마스크 착용 필수 규정을 만든 나라다.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힘들었던 건 인종차별 관련 사건 사고들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동양인이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면 일부 무지한 것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한인 커뮤니티에만도 여러 건의 사건 사고들이 올라왔다. 다행히 내가 직접 당한 적은 없지만 휘파람을 불거나 차로 빵빵거리는 듯한 불길한 신호를 감지하면 얼른 무시하고 지나갔다. 마스크는 둘째치고 나가서 편안하게 산책을 하는 것조차 신경이 쓰였다. 일부 사람이 많은 구간은 강해 보이려 더 씩씩하게 걷고 인상을 팍팍 쓰고 다녔다. 한국에서 편하게 한민족의 일원으로 한국어 쓰면서 살면 될 것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밖에 나가서 이러고 다녀야 하나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고 덩그러니 무인도에 남겨져 버린 느낌은 져버릴 수 없었다. 만나러 갈 가족도 없고,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일도 3월 중순부터 재택으로 바뀌어서 모든 물리적인 인간관계가 단절이 되었다. 말 그대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20층 아파트에서 마주하고 있는 탁 트인 풍경이었다. 여름이 올수록 푸릇푸릇 해지는 나무들과 핑크빛 하늘을 만들어내는 백야의 노을은 넋을 놓고 보게 되고 잠시나마 이 모든 상황을 잊게 만든다. 그렇게 아래쪽 세상과 나를 단절시킨 채 유일하게 붙잡고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엄마, 아빠와의 카톡 비디오 콜이다. 비록 스마트폰 액정 안으로 보이는 반대편 세상이 전부지만 그거라도 없었으면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가족들과 있고 싶다는 생각은 한 달에 한 번씩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혼자 이렇게 잘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했지만 감정이 툭 치고 올라오면 와르르 무너지는 나를 매달 보면서 그냥 사표를 내고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면 이성은 나의 마음을 다시 다 잡도록 도와주었다. 나를 믿고 일을 맡기는 회사와의 계약기간은 채우는 게 예의이고 그렇게 바라던 해외 경력인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며 다독였다. 나름 한 가지 절충안을 고안한 것이 한국에 가서 일도 하고 휴가도 보내고 오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회사는 한국에 가서 일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은 여행이 가능한 국가로 지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출장은 불허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가서 격리 기간 동안 일을 하고 나머지는 휴가를 보내고 오겠다는 나의 요청은 거절되었다. 정 힘들면 사무실에 나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대중교통 타고 다니는 리스크는 생각을 안 하는지... 지금은 동료가 아니라 가족의 지지가 필요해서 가겠다는 건데. 나의 진짜 HOME 다운 HOME에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마음을 좀 추스르겠다는데 외국인에 대한 배려는 그다지 없는 이 회사는 한결같았다. 조직은 개인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안 그래도 이 나라에 정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말뚝을 박는 정 뚝 떨 모멘트였다. 뭐 덕분에 미련 없이 계약 종료하자마자 한때 열렬히 사랑한 이 나라와 회사를 뜰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나마 마지막 희망으로 가지고 있던 한국에서 여름 나기가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정확한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고 나를 가장 잘 다독일 수 있는 것도 나니까.


20대 초반에도 가족들과 떨어져 해외에서 1년간 생활한 적이 있다. 부모님의 감시에서 벗어나 말괄량이 생활을 해보겠다는 초반의 포부와는 정반대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그 무게감을 느끼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성을 다잡는 여정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살아가는 경험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는 것은 확실하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의 삶은 성장의 기회가 되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주관이 명확해지는 경험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만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감을 배우는 좋은 수업인 것이다. 목표가 생겨서 또 한 번의 해외 생활을 결심했고 뜻하지 않게 맞이한 코로나 시대이지만 덕분에 인내력과 집순이 레벨은 매 순간 갱신되고 있다.



잃어야 얻더라 - 이 시국 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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