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 큰. 아. (얼굴이 큰 아이)
유전자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아이는 딸이고 아빠를 정말 많이 닮아 있다. 오죽하면 아이가 고등학생 때 과외 선생님이 아빠를 보고 내뱉은 첫마디가 '남자 00다!'였을까. 아이는 아빠뿐 아니라 친가 쪽 삼촌들 그리고 할아버지와도 정말 많이 닮아 있다. 동네 어른들은 '저 집 식구들은 전쟁통 중에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하셨다. 그만큼 3대가 똑같이 생겼다. 딸은 아빠를 닮아야 잘 산다는 속설이 있긴 하지만 아이에게는 알게 모르게 이 엄청난 유전자를 부정하고픈 순간이 종종 있었다.
얼굴을 들여다보면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입이다. 입이 정말 작다. 정확히 말하면 입술의 가로길이가 짧아 입을 벌리는데 한계가 있다. 치과를 가서 입을 벌릴 때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아무리 크게 벌려도 지름 5cm는 되려나. 치과를 가는 두려움이 생긴 건 이가 아픈 이유보단 안 그래도 안 벌어지는 입을 있는 힘껏 벌려대는 의사 선생님이 미워서 일지도 모른다. 이를 치료하러 갔다가 입술의 옆 면이 허는 것은 허다한 일이다. 이 뿐 아니라 초코파이와 같은 동그란 초코 과자는 깨끗하게 먹으래야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뽑는 햄버거, 아이에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다. 맛이 없어서? 아니, 먹기 힘들어서. 그나마 수제 햄버거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햄버거를 나이프와 포크로 잘라먹을 수 있는 시대가 왔으니.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적인 모양은 괜찮은 편이다. 윗입술에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나있고 색깔도 분홍색으로 나름 예쁘게 생겼다. 다만, 사이즈가 작아 얼굴 하단에 큰 붉은 점이 있는 듯하여 사람들의 시선이 입술로 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학생 때 학식을 먹을 때면 동기들은 아이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안 그래도 작은 입을 한껏 오므려서 오물오물 잘 먹는 아이를 구경하느라. 그 관심에 신이 나서 입을 한껏 쪼그라뜨려 입술을 지름 2cm로 만드는 묘기를 보일 때면 '야 이 똥꾸멍아!'가 날아왔고 그렇게 아이의 별명은 똥꾸멍이 되었다. 항문보단 귀여워서 다행이다.
이렇듯 입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상대적으로 큰 얼굴이다. 아이는 아빠를 닮아 얼굴이 크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이는 크고 동그란 얼굴이 콤플렉스다. 엄마의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아이는 양갈래 머리를 했고 예쁜 분홍치마를 입었다. 멋을 내고 나들이를 가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귀여워 주변에 서있던 중학생 언니들이 아이의 어깨를 톡톡 쳤다. 깜찍한 뒤태에 홀려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언니들은 아이가 돌아보자 갑자기 드러난 큰 얼굴에 흠칫 놀라더니 '아이 귀... 귀엽네~' 한마디 하고 자리를 뜬다. 아이는 영문을 모를 뿐이고 이 상황을 모두 관망하던 엄마는 아이 몰래 숨죽여 키득키득 웃는다. 그래, 놀랄만하지... 몸통이 작은 아이의 큰 얼굴은 상대적으로 돋보기 효과를 가져왔을 테니.
자연스럽게 어린아이는 알아 간다. 주변의 이런 반응이 자신의 얼굴 크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문제의 근원이 바로 빅사이즈 모자만 취급하는 아빠의 얼굴 사이즈라는 것을. 한껏 높아진 얼굴이라는 단어에 대한 예민함이 터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일요일이면 아이는 가족과 함께 성당을 가서 마사를 드린다. 늘 그렇듯 미사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나눠줄 사탕 바구니를 들고 나오시는 신부님께 인사를 하던 아이는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다. 막대 사탕을 한 손에 쥐고 엉엉 울며 뛰어오는 아이를 안아 든 아빠는 당황스럽다. 아빠 손도 뿌리치고 사탕을 받으러 갔던 아이가 왜 우는 것일까.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아이는 서럽게 울부짖는다. '신부님이 나보고 달덩이 같이 생겼데에!!! 흐아아아아앙!!!!'
그랬다. 아이의 차례가 왔을 때 사랑을 하나 쥐어주시던 신부님은 귀여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아유~ 이쁜 달덩이 같네'라고 한마디 건네셨다. 달 덩어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는 크고 둥근 원형이 그려졌고 이쁜 달이고 뭐고 신부님의 그 한마디는 얼굴이 크다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멋쩍어진 신부님께 아빠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제가 잘 달랠게요, 괜찮습니다 신부님~'
그날 밤 마침 하늘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떴다. 엄마는 기분이 안 좋은 아이를 안아 함께 달을 보러 베란다로 나가 달래주었다. '저기 하늘에 보름달 좀 봐봐. 얼마나 예쁘니? 신부님이 오늘 우리 딸 달처럼 아주 밝고 예쁘다고 하신 거야.'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린 아이는 그 후로 별명을 써내라는 설문지에는 한동안 '보. 름. 달.'이라 적었다.
30살이 된 아이는 젖살이 빠져 달덩이 대신 왕달걀 얼굴을 갖고 있다. 자세히 뜯어보면 무쌍의 큰 눈, 오똑한 콧날, 두 산봉우리가 명확한 입술을 가지고 있어서 생긴 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은 입이지만 나름 얼굴의 포인트가 되고 있고 큰 얼굴 골격 덕에 입안은 커서 먹는 것도 참 잘 먹는다. 얼굴 큰 얘기를 할 때면 엄마와 아빠는 아직도 지하철에서의 일과 달덩이 일화를 늘어놓으며 놀린다. 아이가 아빠를 닮아 얼굴이 큰 게 싫다는 소리를 할 때면, 아빠 닮아 머리에 들어가는 게 많은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는 레퍼토리도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