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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Sep 09. 2020

6. 저릿저릿한 해피엔딩

전기를 먹은 아이

아이는 혼자 잘 논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없어도 방 한 켠에서 사부작사부작 종이 접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인형 놀이를 하거나 주변에 놓인 사물들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형제자매가 없는 아이는 모든 놀이에서 작가이자 배우이며 연출가다.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아이의 모든 놀이 스토리는 해피엔딩이다. 가끔 스펙터클 하긴 하지만 이야기 전개의 긴장감을 더하는 고난과 역경, 그런 건 거의 없다. 아이가 배우로서 맡는 1인 多역의 사람, 동물, 혹은 사물은 무조건 착하고, 훌륭하고, 월등하며 뭐든 척척 해내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는 동시에 공주이자 왕자가 되어 Happily ever after 스토리를 구상했다가, 멋진 스포츠카가 되어 입으로 부릉부릉 광속의 질주도 하다가, 행복한 똥개와 주인도 연기하며 각종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엔딩을 만들어간다.


하루는 새로운 빌라로 이사 온 후 집들이 손님들이 있던 날이었다. 아이의 방도 따로 생기고 거실도 넓어져서 상상 속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어진 그런 집이었다. 엄마, 아빠의 손님들 틈에서 온갖 질문 공세에 대답하며 시끌시끌한 저녁을 보낸 아이는 손님들이 간 후 맞이한 차분한 시간이 좋았다. 엄마, 아빠가 부엌을 정리하는 사이 아이는 조용히 거실로 들어가 앉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찬장 앞 바닥에 놓인 은색 수저와 젓가락 세트. 가지런히 놓여있는 수저와 젓가락 세트는 오늘 엄마가 손님상에 놓았다가 방금 정리를 마친 것들이다. 평소 사용하던 수저와 젓가락보다 멋있는 이 세트에 아이는 오늘의 놀이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아이는 이 멋있는 수저와 젓가락을 공구로 사용하여 뭐든 잘 고치는 엔지니어가 될 예정이다.


집주인: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펼쳐 귀에 대며)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엔지니어: 네, 여보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집주인: 네, 기사님. 저희 집에 고장 난 게 있는 데 좀 오실 수 있을까요?

엔지니어: 네 금방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뭔가 고장 난 집의 주인과 엔지니어의 역할을 오고 가는 아이의 독백은 시작되었고 아이의 양손에는 젓가락이 하나씩 들려있다.


집주인: 기사님 오셨어요. 여기에 있는 기계가 갑자기 작동을 안 하네요. 고쳐주세요.

엔지니어: 네 걱정 마세요. 저는 뭐든 잘 고친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의 눈에 벽에 난 구멍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엔지니어: (양 손에 두 개의 젓가락을 쥐고) 아 여기 이 구멍을 고치면 아마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집주인: 네 감사합니다!

엔지니어: (젓가락을 벽에 난 두 구멍에 서서히 넣는다.) 이렇게... 으어어어어... 으아아아아 아!!!!!!


아이가 찾은 그 두 구멍은 전기 콘센트였다. 젓가락이 전기를 만난 순간 강한 전기의 충격은 아이를 튕겨 내보냈고 아이는 젓가락을 떨궜다. 전기의 파동은 아이의 온몸으로 전해 졌다. 아이는 양팔을 앞으로 뻗은 상태로 심하게 떨리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를 찾다가 순간적으로 가해진 충격이 가시고 정신이 돌아오자 엄마를 목놓아 불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울리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져 우는 아이의 소리에 엄마와 아빠는 놀라서 거실로 왔다. 두 개의 젓가락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아이는 양팔을 앞으로 뻗어 굳은 상태 그대로 숨이 막힌듯한 상태로 울고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된 아이의 두 팔에는 붕대가 감겼다. 다행히 병원을 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이의 양손에는 전기가 뚫고 지나간 작은 흉터들이 남았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붕대를 감고 있는 양손으로 로봇 흉내를 내면서 아직도 움직이면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난다면서 농담을 해댔다. 비록 엔지니어로서의 역할은 새드 앤딩이었지만 아이가 전기를 먹고도 살았으니 이 스토리는 의도치 않게 고난과 역경이 가미된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해피엔딩 중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30살이 된 아이는 사람들에게 오른손 엄지에 난 하트 모양 흉터를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재현한다. 이제는 웃으면서 털어놓는 이야기지만 얘기를 할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당시 상황을 직관한 엄마와 아빠도 늘 얘기한다. 그때 전기를 먹는 바람에 아마 조금 더 바보가 되었거나 천재가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후자였으면 좋겠지만 살아 숨 쉬며 보통의 삶을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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