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다되어가지만 아직도 홀로서기가 덜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계기는 연애, 그리고 그다음은 사람 관계 문제. 그 이야기는 차차 풀어가기로 하고 우선 내가 연애 관계든 인간관계든 삐걱 대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보았다.
넘치는 사랑에 익숙한 외동
나는 외동이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외동딸. 엄마, 이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 모든 가족들의 많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특히 엄마, 아빠, 그리고 내가 있으면 다른 생각은 잘 나지 않는다. 우리 셋만의 세계가 워낙 돈독해서. 집이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자라면서 필요한 서포트는 다 받고 자랐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래서 정말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삶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펼치고 싶은 것들을 눈치 보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님께. 그렇게 나는 충분한 사랑이 오고 가는 관계에 익숙하게 살아왔다. 그게 잘 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넘치는 사랑에 익숙한 나머지 그게 내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 높은 기준은 나를 연애 호구로 만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대첩을 가끔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연애든 우정이든 익숙한 사랑과의 갭이 발생하면서 사랑 결핍 증상을 보인 것.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감정이 싹트게 되면 그 익숙한 기준에 맞춰서 '나는 이만큼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왜 나를 이만큼 생각하지 않아?'라고 하는 찌질함을 스멀스멀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로 상대의 마음을 나에게 끼워 맞추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그런 생각은 나를 외롭게 했고, 갉아먹었고 심할 경우는 자존감을 많이 떨어뜨리게 되었다. 내가 나를 없애고 있는 것이다.
내가 느낀 사랑의 결핍
내가 망가지는 이유
내가 정말 많이 의지하는, 나와는 정반대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20년을 넘게 알아온 친구고 부모님들보다 어쩜 서로를 더 잘 아는 친구다. 어느 날 그 친구랑 '우리는 왜 이렇게 친해졌을까'를 놓고 분석을 했다.
그 친구는 형제도 있고 나와는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라 사랑에 익숙한 정도가 나와 다르다. 내가 익숙한 사랑이 10이라고 하면 그 친구는 5나 6 일 것이고 그 친구는 이른 연애를 통해 그 사랑을 10까지 채웠었다. 하지만 7년간 이어진 연애의 이별은 기존의 익숙한 사랑마저 무너뜨리고 마아너스 상태를 만들어 버렸다. 친구는 그렇게 20대 중반에 자신을 한번 완벽히 잃었다.
친구의 결핍
우리는 원인은 달랐지만 닮아있었다.
- 사랑의 결핍을 느낀다는 것.
- 나의 존재와 행복을 다른 사람을 통해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즉, 제대로 나를 사랑할 줄을 모른다는 것. 내 안의 나를 충분히 돌봐주지를 못하고 있었다는 것.
서로의 니즈가 맞았던 것 같다. 나는 내 넘치는 사랑을 나눠 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친구는 사랑을 받고 싶은 공간이 충분히 있었고. 서로 너무 의지를 해서 위태한 관계가 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점차 어른이 되어가며 오히려 성숙하고 지속 가능한 우정을 지켜가고 있다. 여전히 내 베프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나'다
친구와 나의 니즈는 맞을지 몰라도 그걸 모든 사람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외롭고 다른 사람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그러한 훈련의 일부다.
스스로에 대한 Reflection의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외로움은 결핍이라기 보단 내가 스스로 채워야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그 연습이 부족했고 어쩜 평생을 수련하고 단련해야 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내 행복의 비율을 유지하려 부단히 노력 중이다. 내 행복은 오롯이 나에게서 비롯되며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다. 연애와 우정은 타인에 의해 확장되는 행복으로 사라지더라도 내 온전한 행복은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