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이 노래가 들려온다는 것은 바야흐로 대 꽃놀이의 계절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날이 좋다. 살랑살랑 이는 바람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아들도 어느덧 제법 걸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그것마저 대견했다.
봄이 왔으니 벚꽃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모로서 너무나 당연한 마음이 아닐까? 그러나 이 당연한 마음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 당연하지 못했다.
아들과 함께 동네 공원을 찾았다. 그 당시 살고 있던 동네는 안산이다. 안산 이동에는 상당히 긴 구간의 벚꽃 길을 가진 공원이 있다. 아들과 나는 신나는 마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아들이 걷기 시작한 무렵부터 유모차를 태우지 않았다. 아마 아빠이기에 가능한 육아법이지 싶다.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끝까지 스스로 하길 바랐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더라도 스스로 걷기를 원했다.
자신의 걸음으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세상을 구석구석 살피고 관찰하길 원했다. 그리고 아이가 멈춰서 서 바라보는 세상을 같이 보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은 예상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고 바라보고 궁금해한다. 두 살 배기의 눈높이의 가로수는 생각보다 재미가 있다. 아들은 가로수가 나타나면 매만지고 좋아한다. 가로수마다 멈춰서 서 나무를 매만진다. 분명 더러울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도전하는 것을 막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물티슈 군단은 언제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나무를 매만지면 바로 닦아 줘야 한다. 무언가를 만진 후의 손은 바로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로수마다 멈춰서 서 구경을 했다.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꽝이다. 그러나 봄이지 않은가? 봄은 이상하게도 나른해지고 여유를 선물해 준다. 아들에게도 봄의 여유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어른의 발걸음으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공원은 예상대로 아름다웠다. 벚꽃은 휘날렸다. 그러나 그동안은 별로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후 처음 맞은 봄의 공원은 사람 반 강아지 반이었다.
이 글의 제목에서와 같이 우리 집 공룡은 6살이다. 그러니 이것은 약 5년 전의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개의 목줄을 하지 않고 다니는 소형견 견주들이 많았다.
공원에 도착 후 아들과 걸음마 연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아들은 걸을 때 만세를 하고 걸었다. 그게 너무 귀여웠다. 만세를 하고 뒤뚱거리며 열 발짝을 걷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스무 발짝을 걷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저 멀리서 솜뭉치 같은 것들이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푸들이었다. 목줄을 하지 않은 푸들들이 뛰어 왔다!
나는 신속하게 아들을 안아 올렸다. 만약 내가 늦게 발견했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나는 견주에게 따지고 물었다. 공원에서 목줄도 안 하면 어떡하냐고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그러자 견주의 말이 가관이었다. 왜 아이를 안고 있지 않냐며 화를 내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강아지들은 아이를 보면 뛰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중형견을 목줄도 하지 않은 채 산책을 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가 공원에서 안전하게 걸음마 연습을 하길 기대했던 마음은 불안과 공포로 얼룩졌다.
아이들도 강아지들도 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공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서로 충돌 없이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충돌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른의 문제다. 아이들이 목줄 한 강아지에게 다가가는 것은 강아지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스트레스를 받은 강아지는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강아지가 귀엽다고 마구 만지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이다. 강아지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고 자제시키는 것은 어른의 역할이다.
반면 목줄이 없이 아이에게 뛰어드는 강아지는 아이에게 큰 위협이 된다. 아이들이 서 있는 힘은 강아지가 뛰어와 부딪히는 힘을 견딜 수 없다. 자칫 크게 넘어져 사고가 될 수 있다.
몇몇 견주들은 자신의 강아지가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런다는 말을 한다. 강아지가 아이를 좋아하는 것과 강아지의 의도(?)와 달리 아이들이 다칠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신의 강아지가 자기감정을 마음껏 표출함으로 다른 존재에 상처를 줄 수 있다면 통제해야 한다.
또한 강아지들은 자신의 가족은 물지 않는다. 나도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우리 강아지는 우리 식구는 물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왜냐면 경험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추출할 데이터가 없는데 그것이 맞다고 말하는 것을 플라톤은 억견(doxa)이라 진술했다. 그러니 견주 여러분 “우리 애는 물지 않습니다.”라는 소리는 “나는 아주 비이성적인 사람입니다.”라는 소리라는 것을 명심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이 모든 통제는 당연히 어른이 해야 한다. 결국 모든 문제는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문제도 아니고 강아지가 문제도 아니다. 견주들, 어른들의 문제다.
요즘은 법으로 강아지의 목줄 착용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다. 또 단속도 거의 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산책하고 걸음마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강아지들도 즐겁게 산책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이 어른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