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은 어떠한 사람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다. 취향, 취미, 성격 등등 자신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들도 싫어한다. 소란한 것도 싫다. 활동적인 것보다는 정적인 것이 좋다. 회사에서도 외근을 나가기보다는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대인관계도 성향을 따르는 것 같다.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한 사람과 깊이 만나는 것이 좋다. 연애도 그렇다. 스물일곱에 처음 아내를 만나 삼 년이 지나고 나서 연애를 시작했다. 이 년 정도의 연애 기간 중 여행은 딱 한 번을 다녀왔다. 신혼여행도 멀리 나가는 것이 싫어 부산으로 갔다. 학업도 그렇다. 학부 때 전공으로 박사 과정까지 쭉 공부했다. 그것도 한 대학교에서 말이다. 학부 때부터 박사과정까지 지도 교수님을 바꾼 적도 없다.
취향도 그렇다. 장신구가 많은 것보다는 수수한 것이 좋다. 원색보다는 어두운 색이 좋다. 애써 꾸미기보다는 그냥 그대로가 좋다. 신체적으로도 그렇다. 목소리도 허스키하고 중저음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자 성향이다.
이런 내가
“우리 친구들 오늘은 하온이 아빠와 함께 공룡의 세계로 떠나 봐요.”
를 슈퍼 하이 톤으로 외치며 공룡 춤을 추고 있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양육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성향을 떠나는 일인 듯하다. 여기서 오해가 발생된다. 나를 버리고 양육자가 된다는 것을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육아를 “비용”이라 생각한다. 즉 육아란 지불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렇게 생각했었다.
어쩌다 지인들에게 전화라도 오면 늘 물어오는 말이 “육아 힘들지 않아?” 혹은 “그래도 엄마가 육아해야 되는 것 아니야?”이다.
왜 이런 질문을 나는 자주 들어야 했을까? 그것은 육아는 힘든 일 혹은 육아는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된 문화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과감하게 말해 그것은 착각이다.
나 자신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생 생각했다. 그러나 전담 양육자가 되면서 경험하게 된 나는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아들과 노는 시간뿐 아니라 공동 육아를 통해 다른 아이들과 노는 시간도 너무 즐거웠다. 아이들이 신나 하는 미소는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다.
나에게 육아는 비용도 희생도 아니었다. 육아는 나를 확장하는 시간이며 나를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평생 아이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를 좋아하는 나를 발견했다. 여행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들과 나들이 다니는 것이 삶의 큰 행복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리 정돈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존재의 생명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 설정한 것이거나 문화에 의해 설정된 것들이다. 어떤 것은 부모님에 의해 설정된 것들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인간의 자기(self)란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 설정되거나 타자를 통해 설정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육아를 통해 나의 다른 모습들이 발견되고 확장되어 갔다. 육아는 희생이자 나를 소진시키는 과업이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이었다. 생의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에 의해 부여받고 새롭게 설정되는 나라는 자기는 기존의 것을 넘어선다.
육아 품앗이 과정에서 아이들을 위해 동화 구연을 만들어 시연한 적이 있다.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행복하고 신나는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몰입하고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 아이들과 열정의 시간을 보낸 나에게 한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남자분이 아이들과 잘 놀아 주시네요.”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혹은 칭찬의 의미로 던진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불편하게 들렸다.
“저는 남자가 아니라 아빠입니다만…….”
이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아이들에게 뛰어갔다.
나는 남성성이라는 젠더에 갇혀 살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 편협함을 파괴하는 생명력을 지녔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 시간이 나를 나답게 채워나갔다. 니체가 말했듯 아이들의 창조력은 나를 다시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육아는 축복이다. 누군가 육아가 무엇인지 정의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갇혀 있던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해 나가는 성장의 시간이자 축복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