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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컨리 Jun 18. 2020

38년 맏며느리 우리 어머니

어머니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

맏며느리의 무게감


아버지는 첫째로 태어나 "장남"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집안 맏며느리로 시집오셨다. 당시 중매를 통해 결혼하던 시절이었지만 두 분은 연애결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부산 태생, 어머니는 광주 태생이시다.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는 지역감정이 엄청 심했다. 결혼을 승낙받을 때 조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 뱃속에 "나"란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보통 농촌 사람들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습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더 남자 중심으로 집안이 돌아간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줄도 모르고 시집오셨다. 고생 길이 훤한 줄도 모르셨을 거다. 나를 낳고 일 년 뒤부터 농사일을 같이 하셨다. 그때부터 쭉 고생하고 계신다.

어머니는 농사일, 집안일, 맏며느리 역할을 포함해,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시집살이까지 38년 동안 고생하고 계신다. 이러면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그렇지 않다.

좋지 않은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는 어머니 편을 들어주시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던지 간에 조부모님 편만 들었다. 아버지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효자"이다.(어머니는 큰며느리가 해야 할 도리는 하신다.) 어머니는 혈혈단신으로 시집오셨다. 의지할 때라곤 남편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으실 거라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시부모님한테도 영향이 가게 마련이다. 그 사이에서 "눈치 보는 손자, 아들"이 되었다.


요양원은 가기 싫은 곳


얼마 전 할머니께서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병원해 입원하셨다. 엉치뼈에 금이 가서 2주간 입원했다. 2주가 지나 퇴원을 하게 되었고, 집에서 할머니를 간병해 줄 사람이 없어 다시 "요양원"에 입원했다.

코로나 19 때문에 면회가 되지 않아 전화로 안부를 묻고 있다. 며칠 전부터 전화 통화를 하면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신다. 어머니와 나는 할머니를 달랬다. 엉치뼈가 낫게 되면 모시러 갈 거라고 말했다.

아직 뼈가 아물지 않아 걷는 것도 힘든데... 집에 오면 간병해 줄 사람이 없어 시기상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동생은 할머니를 모셔 오자고 이야기한다.

4년 전 할아버지께서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요양원을 가시기 전까지 34년 동안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가 다리에 힘이 빠져서 거동을 못해 2년 정도 간병했다. 엄청 힘들었다. 대ㆍ소변, 목욕은 할머니, 아버지, 나, 동생이 했지만 빨래, 청소, 음식, 설거지는 어머니가 다하셨다. 허드렛일은 어머니 몫이었다. 온 집안 식구가 간병을 했지만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가셨다.

할머니는 여성이시다. 아버지, 나, 동생이 돌봐드리는 것도 한계가 있고 다들 할 일이 있다. 할아버지를 간병할 때 나와 동생은 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 할머니가 병이 낫지 않고 오게 되면 어머니 혼자 감당해야 될 건데 솔직히 말도 안 된다. 요즘 어머니도 몸이 좋지 않다. 그런 뒷감당 할게 눈에 보이는데 나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할머니가 들으시면 서운하시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글을 쓰기 몇 시간 전 할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통화 내용은 이랬다.

할머니: 병원으로 지금 데리러 올 수 없나?

나: 뼈가 아물지도 않아 걷지도 못하시는데 안된다...

할머니: 병원에서도 잘 걷고 있다. 괜찮으니 데리러 올 수 없나?

(나이 드신 분이 금이 가면 단기간에 낫는 게 아닌데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집에 오고 싶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나: 밖에 비도 오고 차가 없어서 안된다고... 비가 그치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가 통화 내용을 들으시고 할머니를 모시고 와야겠다고 말했다. 나보고 할머니를 모셔 오라고 말했다. 아버지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집에 오면 간병하기가 힘들다. 대ㆍ소변, 목욕을 어머니가 다해야 하는데 안된다고 다 낫고 모셔와야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고모가 학생들이 방학하면 한 달 정도 쉴 수 있어 할머니를 돌봐준다." 이 말에 모셔 오자고 한 것 같다.  학교 방학은 7월 말쯤인데 지금은 6월 중순이다. 고모가 할머니를 돌봐준다고 해도 한 달 동안은 어머니가 돌봐야 한다. 어머니가 시간이 많으신 것도 아니다.

같이 농사일을 하는데도 생각 안 하시고 행동하시는 걸 보면 답답하다. 아버지를 지켜본 결과 아들로서는 100점 일지 모르나, 남편으로서 70점도 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을 모신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옆에서 지켜보니 더 그렇다. 시간과 여유,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마음은 있어도 시간과 여유가 없는 세상을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듯하다.




나는 몇 년 전까지 집안일은 당연히 어머니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어머니가 다치셨고 3주 동안 집안일을 해봤다. 집안일을 해보니깐 어머니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집안일은 함께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를 보고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 "부모님을 공경하데 효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시대에 "효자"면 아내 될 사람이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과 아내 사이의 "중간 다리 역할"을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모셔오는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실지 모르지만 어머니를 생각해 좋게 해결했으면 좋겠다. 나는 끝까지 할머니가 낫고 와야 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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