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의 괴리가 큰 만큼
최근에 영화 두 편을 보았다.
<원더>와 <코코>
돌이켜보니 두 영화 모두 참 착한 가족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작품 중에 두 영화를 골랐다.
<원더>에는 안면장애가 있는 자녀가 있는 가족의 이야기.
<코코>에는 뮤지션이라는 꿈을 이루고 싶은 자녀가 있는 가족의 이야기.
두 영화를 보고 나는, 이 영화들이 내세운 주인공은 '자녀'였지만 결국 비추고자 했던 얼굴은 모든 가족구성원, 등장했던 개인 한명한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더>에서는 두 자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했고 두 부부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그들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해주었다. 게다가 보너스처럼 가족은 아니지만 그 친구들의 시점까지 더해주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얼굴을 가진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족, 친구들이 각각 가졌을 어려움까지도 기꺼이 비추어주는 영화였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 주인공이 단상에 올라가는 그 순간에도 주인공'어기'보다 어기의 '부모와 친구'들의 표정에 관심을 갖게되어버린 나였다.
<코코>는 주인공 미구엘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지만 조상들의 이야기가 그 시작점이 되어주고 그들의 변화가 영화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영화 제목은 '미구엘'이 아니라 '코코'다. 유일하게 과거와 현재에 공존하는 인물인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자녀를 위해 본인의 꿈을 미루어두었던 어머니, 장애를 가진 동생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가족들의 관심밖이라고 느꼈던 딸, 학교에서 소수가 되지 않기 위해 장애를 가진 친구를 외면했던 아이, 자신에겐 없는 친구의 어떤면을 자신의 것이라 거짓말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 뮤지션이라는 꿈을 위해 가족을 뒤로한 채 집을 나간 가장이기에 그를 미워하고, 음악을 혐오해야했던 온 가족들의 신념.
사실 이야기를 만들자면 굳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미구엘에게 처음으로 기타를 빌려주던 뮤지션이나 유명한 가수가 되었지만 커다란 비밀(?)을 가진 델라크루즈, 미구엘이 음악에 관심갖는 것을 필사적으로 말리시던 할머니의 성장기 역시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나의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당장 집 밖을 나섰을 때 볼 수 있는 누군가. 눈을 쓸거나 분리수거함을 정리하실 누군가.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노래를 들으며 신호를 기다릴 누군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누군가. 버스 정류장에서 멍하니 서있을 누군가. 하루종일 버스를 운전하셨을 누군가. 밤새 업무에 시달렸을 누군가. 상사에게 상처가 되는 폭언을 들었을 누군가. 제멋대로인 부하직원과 말싸움을 했어야했을 누군가. 생일을 맞았을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을 누군가.
내게는 그냥 '누군가'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이고 '친구'일 누군가.
내 삶에서 주인공은 단연 나다.
내 시선으로, 내 위주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판단한다.
하지만 내 삶에는 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있다.
가족, 친구, 어딘가에서 만났던 동료, 선배, 후배, 지인들 그리고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누군가들.
모두에게 신경을 쓸 수는 없지만 눈길이 닿기만 한다면, 시선과 관심이 가는 사람이라면
온전히 그 사람의 상황과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집에서 쉬면서 여러가지 글과 영상을 접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켜는 TV나 휴대폰에서 나오는 현실의 이야기들과
내가 원해서 접하는 책이나 영화의 이야기들을 비교하면 할수록 그 괴리감에 섬찟 놀라곤한다.
물론 현실이 동화같고 아름답고 즐겁기만 하다면 수많은 작품들이 인기있을수가 없었겠지, 그게 예술의 힘이고 원천이고 역할이지 싶지만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수 없다.
나라도 세상밖에 나갔을 때 편협한 내 판단의 잣대를 과신하지 말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현명한 것이 최선이라 확신하지 말고 조금만 더 측은지심을 가지고 이해의 폭을 넓힌채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그저 그런 '순진하고 바보같고 미련한 것'이 아니라
'넉넉하고 인간적이고 해볼만한 것'이라 인식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들 속에서 착한 영화를 찾아보는 것 처럼
충격적이고 무서운 뉴스들 속에서 착한 뉴스를 찾아보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해피 엔딩'에 안도를 느끼기보단 '해피 프로세스'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면 참 좋겠다.
기억해줘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라.
누구나 한번쯤은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