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는 위기, 의미를 부여하는 위기
지독하다. 지독하게 덥다.
가만히 있어도 나를 괴롭게 하는 햇볕이 얄미워 결코 눈길주지 않고
오직 바닥만을 보며 걷는게 일상적인 요즘,
내 눈에 자주 띄는 것은 '말라 죽어버린 지렁이'들이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 위에서 뻣뻣하고 납작하게 말라 죽어있는 지렁이.
시간이 지나 그 주변을 개미들이 에워싸는 모습을 보노라면
'윽 징그러' 에서 '아 불쌍해'로 나도 모르게 연민이 느껴진다.
지렁이에게 감정이입을 해보았다.
조금만 더 빠르게 움직였다면 퍽퍽하고 건조한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물기가 있는 흙길에 다다를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 지렁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다.
많이 뜨거웠겠지? 얼마나 발버둥을 치다가 죽었을까?
그러다 결국 몸이 말라 죽는 치명적인 위기를 피하지 못했겠구나. 흙 표면 위로 올라와 길을 나섰을 때 자신의 죽음을 예상이나 했을까? 이렇게나 더운데 그냥 땅 속에 있지, 비가 올 때를 기다리지, 굳이 왜 올라와 죽음을 자초했을까?
그런데, 그래도 넌 죽은 뒤에도 개미와 같은 다른 곤충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는구나.
아주 의미없는 죽음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쳐온다.
무언가를 조금만 더 혹은 조금은 덜했더라면 그 위기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걸 컨트롤 할 수 없는 것 같다.
마치 지렁이가 갑작스럽게 길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아쉽고 속상해도 이미 직면해버린 위기나 아픔 앞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말라버리는 사람들이 많겠지.
혹은 다 알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위기속에 뛰어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위기를 겪고 나서 지렁이처럼 타자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타자에게까지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가 더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죽더라도, 넘어지더라도, 흔들리더라도, 그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 다음의 어떤 것, 누군가의 양식으로 다시 이용되고, 또 다른 의미로 살아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지렁이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본다.
지렁이한테도 배울 점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