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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Nov 21. 2023

친정 김장날, 카드값에서 드러나는 엄마의 사랑

왜 김장 때만 되면 찬바람이 도는 걸까? 살갗을 애는 것 같은 추위에 맞춰 처갓댁에 김장을 하러 가는 남편은 고민이 많다. 배추를 새벽에 씻을 때, 고무 대야를 설거지할 때, 무채를 썰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활동성이 좋고 춥지 않을지 미리 생각을 해둬야 마음이 편한 남편은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다. 얇은 내의와 목까지 올라오는 목티, 얇지만 기모가 들어있는 조끼를 택하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된 듯 처가에 갈 준비를 마친다.


이제 가을인가? 싶은 느낌이 들게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거닐기 좋은 날씨였는데, 친정에 내려가는 길 실외 기온은 영하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일정이 있어서 1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친정에는 이미 도착한 둘째 이모와 외할머니 그리고 막내삼촌 내외가 와 있었다. 새벽에 부모님이 뽑아 놓은 배추를 다듬고 배꼽 위까지 올라오는 깊숙한 고무 대야 가득 배추를 넣고 소금 이불을 살뜰히 덮어두었다.


가장 힘들 것 같은 배추 절이기 작업이 끝난 상태였지만 김장을 위해서 할 일은 태산처럼 많았다. 사다 놓은 마늘의 꼭지를 따는 일, 쪽파를 다듬고 씻는 일부터 시작했다. 쪽파일이 시급하다고 하여 막내 삼촌, 외할머니, 남편과 함께 원두막 아래에서 대파 같은 쪽파를 다듬었다.


"세상에 이게 대파야? 쪽파야?" 나는 말도 안 나오는 크기의 쪽파 사이즈에 놀랐다.

"이번에 농사가 얼마나 잘 됐는지 아니~아빠가 엄청 좋아하셔" 엄마는 은근히 농사를 잘 지은 아빠를 칭찬하시면서 쪽파가 크게 자라서 다듬기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쪽파는 말 그대로 쪽파여야 한다. 잔잔한 쪽파가 다듬기는 힘들지만 달큰하고 맛있는데, 차마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손쉽게 작업할 수 있는 아빠의 쪽파에 칭찬 한 스푼을 보내며 열심히 쪽파 대가리를 잘라 삼촌과 남편에게 다듬으라고 나눴다.


"쪽파를 그렇게 놓지 말고 가지런히 한쪽으로 몰아서 쌓아". 노란 상자에 제각각 놓여있는 쪽파를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했다. 삼촌은 쪽파 대가리 자르는 일을 하는 나에게 쪽파 정리를 맡겼다. 쪽파 하나하나 열을 맞춰 왼쪽 정렬하듯 옮기기 시작했다.


"어이~조카 이거 봐봐"


삼촌이 오른쪽 끝에 손을 대더니 쓱 하고 쪽파를 왼쪽으로 밀었다. 황당했다.


"뭐야~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 시켰어"

"네가 일머리가 있나 없나 봤지~~~ 삼촌한테 큰 거 배웠으니 앞으로 잘 써먹어~~~"


삼촌은 내가 일을 썩 잘하지 못하는 걸 알고 일부러 미끼를 던졌는데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쪽파를 다듬으면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시댁에서 쪽파를 처음 씻을 때 하나하나 물에 씻어서 시누에게 한 소리 들었던 일화를 이야기하자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마늘꼭지까지 따고 나서 밭으로 향했다. 배추를 심기 위해 덥어 두었던 검은 비닐을 벗겨내야 했다. 방앗간에서 삼촌과 방앗간에 다녀온 엄마가 밭으로 가기 전에 종이컵 4개만 들고 오라고 했다. 밭에 도착하니 엄마가 테이크 아웃잔 2개를 꺼낸다.


"추운데 우리 이거 먹고 하자"


엄마는 방앗간에 다녀오시면서 유자차 2잔을 사 오셨다. 가족들이 모인 김에 아빠 생신 축하를 하면 좋겠다 싶어 엄마에게 신용카드를 드리며 케이크를 사달라고 부탁드렸다. 엄마는 케이크를 사는 김에 따뜻한 차도 사 온 것이다. 집에는 이모들도 일하고 있을 테지만 딸의 카드다 보니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눠서 먹을 수 있도록 2잔만 사 오신 것 같았다. 유자차를 누가 돈 주고 사 먹나 싶었는데 추운 겨울 김장 일을 하다 밭에서 마시는 유자차는 상큼한 귤향이 나는 꿀차였다. 비닐을 벗기고 집에 돌아오면서 엄마는 저녁을 먹기 위해 필요한 고기를 사 오신다고 했다.


급히 친정에 오면서 아무것도 사 오지 못한 게 미안해서 남편에게 저녁에 먹을 삼겹살을 우리가 사도 되는지 물어봤다.


"장모님이 카드 안 받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카드 드려봐 봐".


남편의 이야기가 끝나고 바로 삼촌과 차를 타고 가려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내 카드로 저녁에 먹을 삼겹살 사 오셔요".


혹시 거절하시면 어떡할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래, 고마워" 해맑게 웃으며 카드를 건네어받은 엄마의 모습을 보며 걱정은 기우였구나 싶었다. 무조건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시는 분이라 어른 집에 갈 때는 과일 하나라도 사 들고 가는 게 여기시는 분이라서 엄마의 반응이 당연했다.


"띵똥"


카드 결제 금액이 울렸다. 5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10명의 어른이 먹어야 하는 삼겹살의 양이 이 정도라는 게 이상했지만 무채를 썰고 있느라 정신이 없어서 핸드폰 창을 닫았다. 무 농사는 왜 이렇게 잘 된 건지.. 한 손으로 쥐기도 힘든 무를 4조각으로 썰어서 무채를 썰어도 한 손에 들어오지 않아 벌어진 손이 얼얼해질 정도로 채칼에 무를 힘껏 밀어댔다. 산더미 같은 무채를 남편과 김장 봉지로 4 봉지 채우고 나서야 김장전야가 마무리되었다. 이제 저녁을 먹고 새벽에 배추를 씻으면 되었다.


고기를 먹기 위해 상을 차리면서 검은 봉지에 들어있는 삼겹살을 보았다. 고기의 부피로 봐서 엄마가 고기를 적게 산 것 같지는 않았다. 진실은 원산지에 있었다. 저녁에 먹을 삼겹살은 딸인 나의 카드로 김장날에 보쌈고기는 외할머니의 카드로 사기로 했었다. 저녁을 먹기 전 정육점에 함께 따라간 막내 삼촌의 증언이 있었다.


"세상에 네 엄마가 딸 카드라고 삼겹살은 수입산으로 보쌈은 국내산으로 사더라"


아! 이제야 이해가 됐다. 10명이 먹야야 할 고기의 값이 5만 원 대로 나오는 게 수입산이라면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반면 외할머니의 카드로는 국내산 고기로 보쌈 고기를 샀다니 내리사랑이 무엇인지 카드 결제 금액을 보고 절실히 느껴졌다.


한바탕 웃으며 고기를 먹고 난 후 피곤에 지친 몸을 뉘어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배추를 뒤집으려면 자고 싶지 않아도 자야 했다. 새벽 4시 30분이 조금 지나자 삼촌이 일어나 하나 둘 깨우기 시작했다. 정말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친정이라는 찬스를 써서 최대한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옷을 입고 차가운 고무장갑에 손을 끼웠다. 남편은 외할머니에게 받은 배추를 1차로 씻고 둘째 이모가 2차로 대야에 씻으면 내가 마무리 헹굼을 해서 막내 삼촌에게 배추를 전해주는 단순 작업을 시작했다. 고무장화의 차가운 냉기가 양말을 뚫고 발끝으로 전해졌다. 손은 바쁘게 움직이지만 어째 추위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경직되게 일하던 찰나였다.


"엄마.... 엄마.... 으앙..."


막내가 내복바람으로 슬리퍼를 신은채 나왔다. 이제 6살이라서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막내가 잠에서 깨어 엄마를 찾고 있었다. 속으로는 효녀가 따로 없구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어서 들어가서 자라고 한 소리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어른들은 내 말이 가당찮기라도 하다는 듯 어서 장갑을 벗고 들어가라고 했다. 못 이기는 척 남편에게 미안한 눈길을 한 번 건네고 막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구오구 우리 막내, 네가 효녀였구나"


차가운 발을 구들장 아래로 들이 밀고 두 팔로 막내를 안아 누웠다. 불이 켜지든 시끄럽게 소리가 나도 깨지 않고 잠만 잘 자는 첫째보다 엄마를 찾아준 막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마음은 밖에 있는 어른들과 남편에게 미안했지만 몸이 따뜻하니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는다는 게 잠이 들었는 나를 새벽 6시에 도착한 셋째 이모가 깨우지 않았다면 아침밥을 차릴 때까지 잤을지도 모른다.


김장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6집이 나눠 먹을 김장이다 보니 김치 공장이 아닐까 싶을 만큼 대형으로 이뤄졌지만 사람의 수도 많아서 서로 맡은 일들을 하니 1시가 조금 넘어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외할머니 카드로 샀던 국내산 삼겹살로 한 보쌈은 흐믈흐믈 입안에서 스르륵 녹아 들 정도로 부드럽고 육즙이 가득했다. 짭조름한 김칫소와 소금에 절여진 달큰한 배추에 싸서 한입 가득 넣어 먹으니 피곤했던 몸에 단백질 공급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가득 먹고 난 후 어제 준비했던 아빠의 생신 케이크를 준비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사람들이 많을 때 축하해 주자는 삼촌의 의견에 따라 준비한 자리였다.


"뭐야, 케이크 사이즈가 왜 이래?"


케이크는 주먹 두 개 정도 되는 상당한 미니 사이즈였다. 먹을 사람이 누가 있냐며 딸의 카드를 가져갔던 엄마는 베이커리에서 파는 가장 작은 사이즈의 케이크를 사 오신 거였다. 먹을 사람이 왜 없었겠냐.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사촌 동생도 있었고 8살, 6살 우리 딸들도 단 거라면 참 좋았는데 엄마는 딸의 카드를 쓰면서 고기는 수입산으로 케이크는 가장 작은 사이즈로 준비하셨다. 나도 내 딸들의 카드를 받으면 엄마처럼 그럴까?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 귀엽게 보이는 엄마의 사랑에 녹아드는 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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