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쓴 종이 여자

나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기

by 친절한금금



1970년대 초, 임상심리학자 폴린과 수잔은 오래전부터 이 심리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다른 사람 눈에 굉장히 우수한 15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했다. 그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자신의 성공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인터뷰 대상에는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과 높은 학식을 지닌 박사, 명성이 자자한 교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입학사정관이 보는 눈이 없어서 대학에 합격했다고 생각했고, 운이 좋아서 시험을 잘 본 것뿐이라고 말했다. 교수의 편애 덕분에 학위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폴린과 수잔은 위의 연구를 통해 ‘가면 증후군’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발견했다. 가면 증후군이란 외부적으로는 이미 성공을 이뤘지만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증상을 뜻한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나는 꿈이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들을 하고 싶다는 일말의 생각이 없었다. 대학교를 간다는 것은 원하는 학문에 대해서 심도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가는 것인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성적에 맞춰서 학교를 갔다. 관심이 있어서 학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가서 배우며 없는 관심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나의 성격은 고지식한 편이라 있는 곳에서 변화할 줄은 모르고 깊이 파는 것을 좋아했다. 성적에 맞춰서 갔지만 진학을 했던 과에 흥미가 생겼고 이 분야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대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은 나무였다. 나무는 학교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배운다. 나무를 잘 키워서 숲을 보존하는 것과 2차 가공을 해서 실생활에 활용하는 것이다. 나는 키우는 것보다는 우리 생활에 쓰이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중에서도 나무를 이용해 종이를 만드는 학문에 집중했다. MDF와 같은 합판을 만들거나 추출물을 이용해서 약품을 만드는 일들도 있었지만 작은 섬유가 모여서 한 장의 종이를 만드는 일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나의 지도 교수님은 학과 시절부터 활달한 나를 좋게 봐주셨다. 실험실에 들어와서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는 것은 어떤지 물어보시고 석사과정에 대한 권유도 자주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대학교에 들어온 것도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 내신을 잘 받아 학교장 추천으로 운 좋게 들어왔던 것뿐 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석사과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하고 운이 좋아서 이뤄진 것이라는 가면 증후군이 있었다.


진로에 대한 오랜 고민을 이어간 끝에 종이 분야를 좀 더 알기로 결정했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매번 그에 해당하는 노력이 있어야 성과가 나온다고 믿는 나였기에 석사를 입학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컸다. 영어와 담을 쌓고 있었던 나는 매주 있는 랩 미팅에서 영어 논문을 가지고 세미나를 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한 줄도 해석이 어려운데 이걸 가지고 어떻게 발표를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교수님 앞에서 발표를 했던 날, 실험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엄청난 망신을 당하고 화장실에 엎드려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기에게 ‘나 고향으로 내려갈 거야’라고 하소연하며, 역시 나는 운이 좋아서 여기에 온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럼에도 다시 책상에 앉아서 다음 세미나를 준비했다. 어렵기만 했던 논문과 발표 수업도 결국 남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안 해봐서 못 했던 것일 뿐이었고 남들에 비해 들인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비하하면서 과거의 성과를 부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언제나 얼굴에 가면을 쓴 것처럼 부족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졸업 논문 주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박사과정 선배가 좋은 주제를 알려줘서 쉽게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실험을 설계하고 논문을 쓰는 일들은 나의 몫이었지만 내가 스스로 주제를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갇혀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학술대회에서 상을 받았지만 교수님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것은 내 상이 아니라고 여겼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에서 나온 가면 증후군의 이야기가 딱 내 이야기 같았다. 물론 엄청난 업적을 지닌 것을 아니었지만 내가 가진 것들을 부정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가졌을 때도 가면 증후군은 나를 따라다녔다. 석사라는 타이틀이 나를 버겁게 만들었던 것이다.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석사를 취득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데 나에게는 무거운 짐과 같았다. 직장 내 사람들이 '석사니까 모든 다 알겠지’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회사 생활은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다. 대기업에 들어갔다면 꿈꿀 수 없었던 일들을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석사과정을 하면서 밤낮으로 실험하며 체득했던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일을 했다. 자체 개발로 국내 생산을 하고자 하는 회사의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다. 종이 만드는 소형 기계를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것이 만들어 지기까지 나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항상 마음 한쪽에는 불안함이 있었다. 혹시 잘못되면 어떡하지? 모두 내 탓은 아닐까? 나는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혹시 문제가 생겨서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면 어쩌지? 말도 안 되는 고민들을 했다.


퇴사를 하고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내가 제작에 참여했던 기계를 통해서 제품을 생산해 회사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나의 공이 아니라고 부정했을까? 가면 증후군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당당하지 못하게 나를 가로막았을까?


이제는 가면 뒤에서 숨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부정하고 숨지 않기로 했다. 매사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신이 좋았던 것도 학교 공부에 성실했기 때문에 이뤄낸 성과였고 그로 인해서 지원했던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공부하지 않았던 영역에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에 안 한 사람들에 비해서 아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에서 가면 증후군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성취를 적어보라고 말한다. 나도 적어보니 내가 해 온 일들이 없었다면 성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여기까지 온 데는 다 이유가 있다!”라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말고 인정해주자. 충분히 잘 해왔고 앞으로도 잘해 나갈 것이라고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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