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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Aug 13. 2024

그 시절 그 엄마

엄마의 제철밥상을 보고 든 생각

갑작스럽게 떨어진 무인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높은 습도와 찌는듯한 더위가 짓누르는 무게감에 내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필요한 물자를 조달받을 수 있다면 정글이 휴양지로 탈바꿈되어 숲 속뷰를 누리겠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먹기 위해 부싯돌을 몇 번이고 부딪혀 가며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의 현실은 이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라떼말이야라는 수식어를 붙여 세탁기가 없던 시절부터 시작하여 유모차 없이 포대기에 의지해 자녀를 열 명씩 낳아오신 그 시절 그 엄마들에게 비교하자니 정글이란 화원 속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원샷할 만큼 여유롭겠다. 하지만 사람이란 자신의 상황밖에 모르지 않는가.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밖에 모른 법. 내 안의 우물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열대우림이다.


이제 앞자리에 4를 달게 된 두 아이의 엄마지만 여전히 친정엄마 품 속 중고등학생인 것만 같다. 내 마음은 여전히 부모님의 하나뿐인 딸인데 양팔에 매달린 어린 자녀들을 보며 현실을 직시한다. 나 엄마구나.


딸을 낳으면 천대받고 아들을 낳으면 대우받던 시절을 지나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 아래 부모님의 보물로 자랐다. 고공행진하듯 대학교 진학률이 상승하던 그때 당연하게 대학을 진학했다. 부모님 시절 대학 진학률과 비교하면 두 세배가 넘는 여성들이 당연하게 학업을 이어가는 시대를 산 것이다. 결혼을 장려하는 부모님과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 사람인 것 같다는 운명적 예감에 결혼을 했다.


아이를 원했지만 번번이 시험에 실패하는 것처럼 임신테스트기에서 한 줄 만 보다 매직 아이로도 보기 힘든 두 줄을 본 순간 환호를 질렀다.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저 작은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존재 자체만으로 예쁜 인형을 보는 것 같은 아이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삶의 전부였다. 엄마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철없던 그때 인형이 말하고 걷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를 넘으면 더 높은 바가 기다리고 있는 높이뛰기의 연속이었다. 기저귀 떼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더니 구구단 외우기로 실랑이를 하고 있다. 앞으로 사춘기라는 거대한 바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도약도 하기 전 마른침만 꿀꺽 삼켜진다.


이번생은 처음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 


친정엄마도 엄마는 처음이었을 텐데. 요즘 친정엄마를 뵙고 있으면 계급장 떼고 '엄마'라는 타일틀 매치에서 승부도 시작하기 전에 진 느낌이다. 부모님 그늘 아래 살 때 밥 한 끼 굶은 적이 없었다. 새벽 6시가 되면 기관차를 집어삼킨 것 같은 압력밥솥의 추 돌아가는 소리가 모닝콜이었다. 국과 갓 지은 밥으로 든든히 엄마밥을 먹었던 그때와 달리 마른 시리얼이 담긴 국그릇에 차가운 우유를 넣어 주고 있을 줄이야.


제철밥상이 집에서 가능한 엄마가 내 엄마라니.


오랜만에 방문한 친정에 제철 밥상이 차려졌다. 고구마 줄기 무침, 가지 구이, 노각 무침 등 쌀밥집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반찬에 식구들의 젓가락질이 멈추지 않았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숙모와 반찬을 나르며 이야기를 나눴다.


가지구이와 직접 담근 매실 장아찌 무침


"엄마는 어떻게 뚝딱 반찬을 해내실까요. 신기해요"

"친정엄마 시대분들이 대부분 그러시잖아"


시대적 흐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때는 그랬지 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러했던 것들이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던 엄마들처럼 친정엄마 역시 뽀글 머리 파마에 가족이 우선시 되는 삶을 사셨다. 나를 돌보는 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채 생계와 가족이 1번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 안의 동굴 속에 외치는 메아리


주변에 또래 엄마들을 보면 각양각색이다. 끼리끼리 일수도 있지만 공통점을 찾자면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이 우선이 되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가슴에 다들 품고 사는 것이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어떤 일을 할 때 즐겁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필사를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내 키보다 높이 자란 풀숲을 한 손 한 손 밀쳐내며 나아간다. 아직도 망망대해 같은 현실이지만 쓰고 그리다 보면 엄마 이전에 '작가'라는 타이틀에 진짜 이름을 달고 있는 것 같다. 산소 호흡기 같은 글쓰기를 손에서 떼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제철밥상을 차려줄 수는 없지만 계절마다 많은 것을 보여주며 아이들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기는 엄마. 맛집에서 혹은 친정 엄마를 통해 제철마다 아이들 입에 제때 먹을 것을 주는 엄마. 삶의 방식은 달라도 제철에 먹여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행하는 나는 비교 불가한 엄마의 사랑을 실천 중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쓰면서 오늘도 잘 먹이자 반성하고 더 사랑하고자 한 글자 한 글자 쓰며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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