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늦었다. 쉬지 않고 지하철 역 한정거장 정도를 뛰어가야 셔틀버스를 간신히 탈 수 있다. 미처 말리지 못해 발아래로 빗방울 떨어지듯 머리에서 물이 떨어진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엘리베이터에 탄다. 1평 남짓 안 되는 이 공간에 익숙한 향기가 한가득 채워져 있다. 그 사람이 탔나 보다. 1004호에 살고 있지만 천사와는 거리가 먼 회사 대리님은 섬유 유연제를 들이부어서 세탁을 하는 것 같다. 1504호에 살고 있는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그 사람의 향을 맡으며 ‘벌써 출근을 했나 보네’ 속으로 중얼거린다. '띵'하고 울려 퍼지는 1층 도착 알림음을 달리기 신호탄이라고 생각하며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오늘은 여자 주인공이 어떤 수모를 받으며 드라마를 이끌어 갈지 궁금한 마음을 안고 셔틀버스로 퇴근한다. KBS 1에서 방영하는 저녁 드라마를 보며 퇴근하는 길은 항상 아쉽다. 드라마의 시작은 꼭 맞춰서 볼 수 있는데 집 앞에서 내리는 순간에 꼭 하이라이트가 절찬리에 상영 중에 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후문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빨갛고 둥근 야외 테이블이 펼쳐져 있는 치킨 집이 있다. 키가 큰 주민 1번과 키 작은 주민 2번이 뿌옇게 서리가 낀 호프집 맥주잔을 들고 보기에도 시원한 청량함을 들이키고 있다. 조용히 그 앞을 지나가고 싶지만 치킨 집에서는 들어오는 사람과 강아지까지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코 앞에 위치해 있었다.
“어이~주민, 와서 치킨 먹고 가”. 대리님이라고 부르지만 퇴근 후에는 주민이라고 칭하는 분들과 어느새 둥글게 앉아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치킨 다리 하나를 뜯고 있다.
언제나 시작은 좋다. 하지만 우리의 모임의 시작이 회사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키가 큰 주민 1과 나는 대부분 싸우면서 헤어졌다. 회사 일을 집으로 끌고 들어오면 안 되는데 술자리의 안주가 치킨보다 맛있는 회사 이야기라서 잘근잘근 씹다가 서로 의견이 엇갈리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난 원수 지간이 되고 만다. 그러면 중개 역할을 하는 주민 2가 다가와 우리를 말리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 되었다.
싸우면서 정이 들면 안 되는데 나는 어느 순간 주민 1과 가까운 사이가 되고야 말았다. 차가 있었던 주민 1과 카풀하는 일은 연인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밤인지 아침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새벽에 출근길을 나선다. 카풀을 하니 늦게 일어나도 지하철 역 한정거장 거리를 뛰지 않는 장점이 있다. 다만 주민 1번은 출근 시간에 민감하기 때문에 카풀을 하며 그의 시간에 맞춰야 했다.
띵동.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니 작은 공간 안에 채워진 섬유 유연제 향기가 가득 차있다. 먼저 내려가서 차를 데워놓고 있겠다더니 엘리베이터를 탔을 뿐인데 그 사람이 벌써 차에 가 있다는 것을 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첫 출근을 하고 퇴근하며 후문을 통해서 들어오던 날, 빨간 원형 테이블에 있는 그를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잘못하면 이 사람이랑 얽힐 수 있겠다’는 여자의 촉이었다. 결혼할 사람을 보면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던데… 종소리까지는 아니었지만 묘한 감정이었다.
취업을 하면서 자취를 위해 10군데의 매물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찾게 된 낡은 1504호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알 수 없는 온기가 있었다. ‘이 집이다’ 생각했고 그날 당장 계약을 했다. 만약 내가 이 아파트를 오지 않았다면 1004호 사는 이웃과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세상을 살아갈 때 수많은 선택이 있다. 인생은 개척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필연과 우연 사이에서 나의 운명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로 갈리게 된다. 하지만 선택이 되었을 때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남편과 결혼한 지 8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여전히 나의 머릿속에는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더 괜찮은 미래가 될 수도 있고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아니라면 내 인생에 더 좋은 남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믿기로 했다. 그게 내 운명이었고,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즉흥적인 성격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 온 나의 결혼은 그럼에도 성공적이다. 빈번히 싸우는 부부이지만 조율의 맛을 느끼며 가족의 정을 알콩달콩 쌓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나이 40을 바라보며 딸을 키우는 지금 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운명만을 바라보고 결혼을 배팅하기에는 두 남녀의 만남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들이 많다는 것을. 이기적으로 보이고 계산적이라도 결혼은 골백번을 생각해도 아깝지 않게 많은 생각을 하고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더라고 방향성을 두고 가는 것과 동전 앞 뒷면 까서 결정되는 대로 우연에 맞기는 것은 천지차이라고 본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 토끼 같은 자녀를 낳아 가족을 구성할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내 딸들이 더없이 신중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