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명절이 오면 큰 아버지 댁에 모여 바쁘게 하루를 움직였다. 5남 2년 중 넷째 아들이었던 아빠에게 시집 온 엄마는 설과 추석이면 음식을 하기 위해 큰 형님 댁으로 발을 움직였다. 막내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결혼을 했던 아빠의 형제들이었기에 음식을 하는 며느리의 손이 꽤 많았다. 한 명이 나물을 무치고 탕국을 끓이면 나머지 세 며느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전을 부쳤다. 넓은 거실 한 복판에서 깔깔 거리는 며느리들의 웃음소리와 고소한 기름 향기가 퍼져갈 즘 남자들은 티브이 앞에 앉아 점심 상을 기다린다. 빠르게 음식 준비를 마치고 큰 상 두 개가 준비된다. 해가 잘 비치는 창가 자리에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저를 든다.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펼쳐진 상에 엄마와 앉은 나는 노릇하게 방금 구워진 전을 먹으며 입 안에서 퍼지는 들쩍한 기름 맛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음식 준비도 다 했고 차례를 지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 사이 어른들은 초록색 천을 깔고 빨간 네모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그림 맞추기에 정신이 없다. 앉아 있는 사람은 끝까지 같은 그림을 쫏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과일과 커피를 가지고 와 곁눈질로 바라보며 손으로는 끊어지지 않는 사과 껍질을 보기 좋게 깎아냈다. 가족들과 모여 있으면 내 귀에 꽂히는 건 엄마의 웃음소리뿐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입담이 좋았던 엄마는 항상 대화의 주인공이었다. 가족 안에서 엄마가 며느리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에게는 살아있는 '며느리 교과서'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낸다. 20명 넘게 모여있던 큰 아버지 댁에서 각자의 갈 곳으로 흩어지는 시간이다. 며느리는 친정으로 가고 손주 며느리도 친정으로 가는데 우리 엄마만 친정으로 가지 못했다. 넷째 아들이지만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우리 집에는 명절에 고모 두 분이 찾아오신다. 고모의 시댁에서 차례가 끝나자마자 여느 며느리들과 같이 친정아버지를 찾아뵙기 위해 우리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고모부들과 고모를 대접하기 위해 어제 했던 요리의 연장선으로 손님맞이 음식을 별도로 준비했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닌데 동그랑 땡을 부쳤고 김장독에서 시큰한 묵은지를 바가지에 담아와 큰 양푼에 넣고 지글지글 끓였다. 대문 앞까지 퍼지는 엄마의 음식 냄새를 맡은 고모부들은 채 발이 문 앞에 닿기도 전에 '오늘도 소주 한 박스 비우겠구먼!'이라며 입맛을 다시며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고모들이 모두 아빠의 손 아래 동생들인지라 고모부들 나이 또한 젊었다. 그때는 모두 30대 후반이었고 초등학생을 키웠던 시절이었으니 <응답하라 1998>이 느껴지는 부모님들의 생기가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술을 한 잔씩 들이켜고 고모부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이끌어 가는 엄마의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체력이 약한 아빠가 일찍 들어가 주무셔도 고모, 고모부와 술잔을 기울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엄마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인싸였다.
20대가 되어 명절이 오면 고향에 내려가는 버스가 기다려졌다. 빨리 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었고, 이제는 성인이 되어 고모부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며 시끌벅적한 그 자리에 내가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20년을 넘게 이어 오던 명절 패턴이 바뀐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찾아뵈어야 하는 장인어른이 안 계시니 고모부는 더 이상 명절에 오지 않으셨다. 그리고 엄마는 그때부터 명절 당일에 친정을 가셨다.
결혼을 하고 첫 명절이었다. 시댁은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명절 전에 미리 방문해서 어머니, 동서와 함께 음식을 했다. 엄마를 본받아 차례음식을 하는 일은 즐거움이었다. 술을 꽤 좋아했던 시어머니와 한 잔 두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음식을 준비하고 동서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재미있었다. 이게 모두 살아있는 '며느리 교과서'를 잘 습득한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몇 해전부터 나는 명절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연휴가 길지만 명절이 뒤에 있었던 날에는 친정을 먼저 방문했다. 임신을 했을 때는 시어머니의 배려로 어디도 가지 않고 집에 만 머물기도 했었다. 코로나 시국에는 어린 손주들이 걱정되시는 시부모님이 신경을 써주신 덕분에 멀리 있는 시댁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 한 시간 거리인 친정에만 방문했었다.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명절에 친정을 먼저 방문하는 일, 차례를 지내는 날 친정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생소한 일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단 한 번도 명절 당일에 엄마가 친정을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 혹은 안쓰러움을 느끼지 못했었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지내온 30년이었기에 그동안 엄마가 명절에 보여왔던 웃음 뒤 얼마나 많은 속을 끓였을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도 큰 엄마들이 친정에 가는 것처럼 명절에 부모님을 뵙고 싶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결혼 후에야 겨우 하게 되었다. 차례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는 여러 이유로 친정을 두 번째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명절이 이제야 애달프게 느껴졌다.
명절이 싫은 건 당연히 가야 할 곳이 시댁과 친정인데 정해진 연휴에 모두를 만족시키며 갈 수 없다는 현실 때문이다. 어느 집을 먼저 방문한다던지, 누구의 집에 더 오래 머문다던지 하는 눈치싸움이 기 빨리게 한다. 명절 본연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떠나서 어느 한 곳도 서운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니 괜한 감정싸움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배운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잘 이수한 덕분에 이 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진다. 명절이라는 이유 덕분에 멀리 계시는 부모님을 뵙기 위한 수단이 하나 생긴 것이고, 쉽게 볼 수 없는 친지들이 한 데 모여서 밥 한 끼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누가 먼저냐를 따지지 말고 오랜만에 만나는 내 사람들을 환대해야지. 만남 자체를 감사해하며, 명절 덕분에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음에 다가오는 추석도 기쁜 마음으로 맞이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