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와 파를 씻고 아침을 먹었을 뿐인데, 시계의 작은 바늘이 벌써 11시를 향해있다. 아직 김장다운 김장은 하지도 않았는데,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다니 금순이는 마음이 바빠졌다.
양념을 하려면 어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안방에 들어가 보니 시어머니는 꼼짝도 않은 채 잠이 들으셨다. 그럴 만도 하시지. 겨우 두 시간 주무시고 일어나 배추를 씻고 대식구의 아침까지 차리셨으니, 칠순이 넘으신 나이에 버거우실만하다.
시어머니가 주무실 동안 금순이는 시누, 동서와 주방에 둘러앉는다. 도란도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아버지가 9월 말에 심었던 마늘의 상한 부분을 도려냈다. '장갑이라도 끼고 할걸...' 어느새 아려오는 왼쪽 엄지 손가락을 물로 씻으며 금순이는 생각했다. 손질이 끝난 마늘을 소쿠리에 한아름 담았다. 깍둑 썬 무, 생강까지 담으니 조그만 언덕처럼 야채들이 수북이 쌓였다. 남편과 함께 야채를 갈기 위해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집 앞 시장으로 길을 나섰다.
김장철에 유독 바쁜 야채가게 아주머니가 정신없는 와중에 반갑게 인사하신다.
"멀리서 김장하러 왔구먼!"
"네, 저 이것 좀 갈려고 하는데 될까요?"
"지금 너무 바쁜데.. 이렇게 멀리서 온 며느리부터 해줘야지 어떡해"
생색을 내려고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야채 가게 아주머니는 아침에 주문받은 마늘도 갈지 못한 상황이었다. 투덜투덜 푸념을 읊조리며 갈지 못한 마늘들을 금순이에게 보여주었다. 이럴 때 웃는 것이 최선이다. 머쓱한 금순이는 최대한 눈을 활처럼 휘어 선심 써주신 아주머니를 향해 눈웃음을 짓는다.
시장에서 갈아온 야채에 시아버지가 5월 초에 심어 태양초로 만든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린다. 액젓과 설탕 등을 넣어 김칫소가 숙성되기를 기다리며 점심을 먹었다.
게눈 감추듯 식사를 한 뒤에 본격적으로 배추에 양념을 넣기 시작했다. 김장하는 2시간 동안 쭈그려 앉은 자세로 배춧잎을 넘기며 김칫소를 채운다. 10년을 해와도 익숙지 않은 자세지만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라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번 김장에서 금순이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보쌈"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김치를 담글 때 보쌈과 막걸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유리 글라스에 빨간 양념을 묻혀가면서 하얀 막걸리를 들이켜고, 작은 배춧잎 하나 무심히 떼어 보쌈과 김치를 같이 먹어줘야 일에 활력이 생기기 마련인데, 올해 김장에는 보쌈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녁에 삼겹살이라도 먹는가? 금순이의 기대는 와장창 무너졌다. 마당에서 고기를 먹으려면 긴 테이블을 설치하고 주방에서 많은 반찬들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뒷마무리는 언제나 시아버지의 몫이었다. 생각해보니 돼지를 먹는 일은 시부모님에게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돼지'로 하는 모든 것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비건을 실천하시려는 건가? 금순이는 생각했다.
우습게도 '올해는 보쌈과 삼겹살을 먹지 않을 거야'라는 시부모님의 말씀에 금순이는 슬펐다. 못 먹어서 속상한 것이 아니라 시부모님의 나이 드심이 갑작스럽게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번거로워도 고기를 좋아하는 시부모님이셨는데, 10년간 당연스럽게 해오던 김장의 피날레가 사라졌다. 김장이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이 유독 크게 다가왔다.
저녁 6시가 되어 김장을 마무리하고 시누, 동서와 함께 목욕을 갔다. 금순 혼자 가면 좋을 텐데 어린 두 딸도 함께 목욕탕을 데려가야만 했다.
금순이의 딸들은 오랜만에 오는 공중목욕탕에 눈이 돌아갔다. 특히 7살 딸은 냉탕이 무섭지도 않은지 물속에 들어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수하는 것이 아닌가. 일일이 아이들을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떼가 불어 나길 바라며 몸은 탕 속에 있지만, 눈으로 딸들을 좇으며 그들의 저지레를 말리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5살 막내까지 언니를 따라서 냉탕을 참새 방앗간처럼 왔다 갔다 했다. 어째 하지 말라는 것만 곧잘 하는 게 금순이가 낳은 것은 청개구리가 아닐까 싶었다.
아이들이 다칠까 봐 경계하던 금순이의 귀에 '딱'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32번~". 드디어 금순의 차례가 온 것이다! 마침 목욕을 마친 시누가 탕으로 들어왔다. 고모의 말은 철석같이 따르는 두 딸을 맡기고 이제야 홀가분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목욕관리사가 물 한 바가지를 침대에 내던지듯 뿌린다. 대충 쓱 씻어 놓은 매끈한 침대 위로 금순의 몸이 뉘어졌다. 목욕 관리사님의 손길을 따라 지우개가 연필을 지우듯 그동안에 쌓였던 피로가 몽글몽글 씻겨갔다. 가려웠던 등까지 시원하게 밀고 간단한 마사지까지 받으니 25,000원이라는 돈이 주는 힐링에 감사함마저 들었다. "마사지 더 할래요?". 여기서 조금의 돈을 더 주면 전신 오일 마사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남자들을 생각해서 어서 돌어가야 했다.
시댁에 가니 남편이 이미 저녁을 차려놓은 상태였다. 시어머니는 평소에 먹는 되지 말고 이번에는 회를 먹어보자고 하셨다. 상에는 하얗고 뽀얀 광어와 우럭이 있었다. 성기 성기 썰려있는 모양새가 먹기 좋아 보였다. 초장에 한 입, 간장에 한 입, 막장에 한 입 먹다 보니 회를 어떻게 먹은 건지 모르겠다. 회를 거의 드시지 않는 시부모님은 상에 앉지도 않으셨는데, 금순이는 앉은자리에서 회 한 접시를 가볍게 해치웠다. 맛있게 회를 먹었지만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돼지가 낫지 않았을까 되짚어보는 금순이다.
목욕도 하고 배도 부르니 노곤해진 금순이는 스르르 눈이 감긴다. 이제 발 뻗고 자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시누 식가가 어제 노래방을 가지 않았으니 또 가야 한다고 했다. 분명 오늘 새벽 두 시에 노래방에서 나온 것 같은데 19시간 만에 다시 노래방을 간다고???
말이 나오기 무섭게 어느새 금순이는 마이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김장을 끝내서 그런가? 마음이 한 결 가벼운 금순이의 흥이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은 금순이만 그런 것은 아니었나 보다. 한 때 콜라텍을 주름잡았던 동서의 안무와 몸치지만 고속버스 춤 정도는 출 줄 아는 금순이의 댄스로 노래방은 어느 가요 무대보다 떠들썩했다. 급기야 금순이의 남편은 금순을 불러들였다. "이제 좀 쉬어". 며느리들의 재롱잔치로 광란의 밤이 또 새벽으로 이어졌다.
다음날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이 김장으로 인한 몸살 때문인 건지 노래방의 여운인지 알 수 없다. 금요일부터 이어진 김장과 두 번의 노래방, 목욕탕까지 쉴 새 없는 일정에 목도 몸도 지칠 대로 지치지 않았을까.
트렁크 한가득 김치를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명절보다 피곤함이 더했다. 주객이 전도되어 김장이 주는 육체적이 피로감보다 나이 들어 노느라 소모된 체력이 더 컸던 까닭이다.
금순이네는 최근 제사를 절에 올렸다. 더 이상 제사를 진행하기 힘든 시어머니의 힘든 결정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거리 김장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올해 김장을 하면서 유독 지쳐 보이는 시부모님이셨다. 문뜩 온 가족이 모여 김장하는 전통도 몇 년 남지 않은 것 같다. 금순은 복잡한 마음을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