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시댁 김장 (1)

by 친절한금금

금순이는 바쁘다. 전 날 챙겨 놓았으면 편했을 김치통 씻기를 부산 내려가기 3시간 전에 헐레벌떡하고 있으니 제 정신일 수 없다. 화물연대 파업과 기름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거리 이동 전에 기름을 넣어둬야 한다는 말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준 후 주유소를 들르는 일도 잊지 않았다. 12시가 땡치면 신데렐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12시가 되는 순간 시댁을 향해 출발해야 했다. 10시부터 남은 두 시간 동안 필사를 다해서 짐을 싸는 금순이다.


11시 55분 남편의 전화를 받고 금순이는 화들짝 놀랐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소등 작전이 시작됐다. 안방에 멀티탭을 시작으로 거실에서 불이 들어 올 소지가 있는 것 코드들을 통화하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도착한 남편에게 뒷정리하고 3분 뒤에 내려가겠다고 했지만, 핸드폰을 보니 이미 5분이 지나간 상황이었다.


장거리를 떠나는 순간은 긴장의 연속이라 스트레스가 심하다. 가뜩이나 덜렁대는 성격이라 무엇하나 빠뜨리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다. 하지만 출발하기 위해 차 문을 닫는 순간, 금순이의 머릿속도 셔터를 내린다. 이미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다. 고속도로에서 생각난다고 해서 되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 출발했기에 6시간 만에 도착한 금순이와 남편은 옷가방도 풀지 못한 채 배추를 다듬었다. 작년까지 시누와 어머니가 하시던 일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수험생을 돌봐야 하는 시누가 미리 올 수도 없다. 몸이 아프신 시어머니 혼자 배추를 다듬는 일을 허용하지 못한 며느라기 금순이는 남편의 반차를 갉아먹으며 나서서 시댁을 간 것이다.


의지는 앞서지만 금순이는 안타깝게도 일머리가 좋지 않다. 처음 하는 일이라 남편이나 금순이가 쪼갠 배추의 모양새가 좋지 않다. 하지만 곰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인지라 배추가 비스듬히 쪼개지고, 쳐내지 않은 썩은 부위가 보이더라도 시어머니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셔야만 했다.


(이후의 일이지만 김칫소가 남아 김치를 추가로 절여야 할 때 시누가 자른 배추를 보고 "금순아, 배추는 이렇게 잘라야 하는 거란다"라고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소금을 치고 바쁜 상황이라 말씀은 못하셨지만, 아들 내외가 다듬어 놓은 배추가 마음에 안 드셨을 것 같다. 시누가 자른 배추는 반으로 일정하게 잘라지는 장난감처럼 균일하고 반듯했다.)


금순이는 배추가 참 많다고 생각했다. 친정에서도 100포기가 넘는 배추를 만났는데, 부산에 와서도 80포기가량의 배추를 마주할 줄이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쪽파였다. 그동안 어머니와 시누가 정리해 놓아서 몰랐던 쪽파 다듬기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시누가 쪽파를 다듬어 파김치를 줄 때 좀 더 감사함을 많이 표현할걸 싶었다. 쪽파 5단을 모두 다듬고 나니 이제야 엉덩이를 의자에서 뗄 수 있었다. 무릎이 한 번에 펴지면 좋을 텐데 금순이의 관절은 기름칠을 하지 않은 로봇처럼 삐그덕거렸다. 징~ 하는 느낌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김장의 두 번째 코스는 5시간 뒤 배추를 뒤집는 것이었다. 티브이나 보면서 좀 쉬고 싶은데 노래방을 가자고 한다. 응? 노래방? 내일 시누 식구가 오면 다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배추도 뒤집어야 하는데... 노래방을 가자고 하니 선뜻 마음이 나서지 않았지만, 어느새 내 손에는 마이크가 들려져 있었다.


노래 좀 하는 금순이는 곧잘 100점이 나왔는데, 그럴 때마다 시아버지의 지갑에서 초록색 배춧잎이 나왔다. 노래방에서 만난 배춧잎이 더 반가운 건 왜일까. 100포기, 200포기.. 절인 배추와 달리 이 배춧잎은 많을수록 좋을 것 같다.


새벽 두 시까지 노래방에서 놀고 온 뒤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뒤집고 잘 준비를 했다.


자긴 뭘 자. 시어머니가 들고 오시는 맥주를 보니 수다타임이 시작되는 것 같다. 금순이는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잘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맥주를 마시지는 않았다. 나름 시댁 김장이라고 긴장을 해서였는지 평소 마시던 술이 술술 들어가지 않았다. 새벽 4시가 되었다. 금순이는 시누가 도착했을 때 뜬 눈으로 맞이 할 수 있는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눈은 뜨니 8시 30분이다. "아차! 배추를 뒤집어야 하는데". 밖에서는 배추를 씻는 소리가 들린다. 금순이는 세수도 하지 않고 재빠르게 슬리퍼를 신고 나가 동태를 파악한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두 분이서 조용히 배추를 씻고 계셨다. 손으로 대충 눈곱만 뗀 채로 어머니 옆에서 배추를 씻어낸다. 내 얼굴은 씻지도 못했는데 배추는 깨끗한 물에 몇 번을 헹궜는지 모른다.

10시쯤 됐을까? 배추 80포기가 다 씻어질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배려의 끝판왕을 자랑하는 금순이네 시댁은 일부러 사람을 깨우지 않는다. 차라리 다 같이 깨워서 빠르게 끝내면 좋을 텐데.. 속으로 금순이는 구시렁거렸지만 돌아올 시어머니의 답변이 뻔했다. '이까짓 것 나 혼자 해도 금세 하는데 더 푹 자라고 해야지'. 금순이는 자식 사랑이 끔찍한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말도 꺼내지 않고 배추만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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